[소설]오래된 정원 (58)

  • 입력 1999년 3월 8일 18시 58분


거기에도 나무들이 있었지만 아래쪽보다는 듬성듬성했고 바위도 몇 개 솟아올라 있었다. 나는 나무 사이로 저 너머를 내다보았다. 물론 거기 무슨 널찍한 바다가 가슴이 툭 트이게 펼쳐져 있지는 않았다. 좁다란 다른 골짜기가 보이고 그 뒤에 이쪽보다 더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산자락이 오른편으로 길게 뻗어내려간 끝자락쯤에 내가 버스를 타고 달리던 그 길이 틀림없는 신작로가 하얗게 보였다. 왜냐하면 길 옆으로 개천의 지류가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바위에 올라앉아서 땀을 식혔다. 조금 아래쪽에 편편하고 나무가 드물게 자라난 빈터가 보여서 내려가 보았더니 예쁜 무덤 하나가 있다. 예쁜 무덤이라니. 너무 오랫동안 버려 두어서 봉분은 주저앉았고 비석은 커녕 비목조차도 없다. 주저앉아 할머니 가슴처럼 그냥 평지와 다르게 봉긋한 흔적이 무덤이라는 걸 알아보게 할 정도였다. 잡풀들이 자라나 있건만 산 아래에서처럼 길다란 억새니 속새니 강아지 풀이니 하는 것들은 없고 알맞추 자란 조선 잔디 틈새로 오랑캐꽃이며 토끼 풀꽃들이 피어 있다. 산바람이 한들한들 불어왔다. 나는 마음이 편해져서 묘지에 등을 기대고 누웠다. 안녕하세요? 몇 자 아래에서 삭아버린 무덤의 임자를 잠깐 생각했다. 그가 지나온 거리와 마을을. 그리고 그가 사랑한 사람들을. 무덤의 꽃들은 거기 와 어푸러져 우는 이들의 눈물을 머금고 자란다고? 거짓말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정적과 바람을 보면 생의 저 너머에 괜찮은 게 있을거야.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는 신문을 보고나서 아까 산에서 만난 죽음이 객관 세계와 얼마나 동떨어진 나의 감상인가를 깨닫다. 종교재판의 낯설지 않은 기록을 적어 본다.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손발, 머리통에서 빠져 나온 눈알들, 다리에서 떨어져 나온 발목들, 관절에서 뒤틀린 힘줄, 몸통에서 뒤틀린 견갑골, 부풀린 동맥, 밀려진 정맥, 천장까지 끌어 올려졌다가 바닥으로 동댕이질쳐지고 빙글빙글 회전시키고 머리를 거꾸로 하여 공중에 매달리는 희생자들. 나는 고문자들이 피의자들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회초리로 두들기고, 손가락을 으스러뜨리고, 무거운 물건을 몸에 묶어 공중에 매달고, 굵은 밧줄로 꽁꽁 묶고, 유황으로 지지고, 뜨거운 기름을 온 몸에 뿌리고, 불로 그을리는 모양들을 보았다.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받고 자백할 때 수사관은 그녀에게 말했다. 만약 지금까지 자백한 것들을 부인할 의사가 있으면 차라리 지금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유리하게 써 주겠다. 그러나 네가 만약 법정에서 사실을 부인한다면, 너는 다시 내 손아귀로 돌아와 이제까지 보다 더 가혹한 꼴을 당할거야. 나는 돌에서 눈물이 흐르도록 할 수도 있어.

세상에, 저건 중세 때였는데. 지금 여기서 어쩐지 많이 들어본 음산한 목소리가 아닌가. 나는 그이가 당한 사십 오일 동안의 지옥을 그 누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아, 우리는 정말 운이 나빠. 산에서 만났던 풀꽃들에게조차 부끄러워 해야 하다니.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자. 세계에 정해진 인상은 없는 거야. 그림은 처음부터 붓을 든 자의 착각이야. 그이가 저 봄 비를 이름 지어진 것이라고 읊은 것처럼. 사회주의는 계급이 사물을 보는 시선을 결정한다고 말하겠지만. 다시는 경치를 예찬하지 말아야지. 그림은 보는 방식이야.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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