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질서파괴자」 조치훈

  • 입력 1999년 3월 12일 18시 55분


조치훈(趙治勳)이 바둑을 둘 때마다 일본의 프로기사들이 해설을 하면서 하는 말이 있다. “역시 놀랍도록 격렬한 수를 두는 군요.” “왜 형세가 좋은데도 이런 지독한 수를 둘까요.” 한때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는 말로 유명해진 그의 기풍대로인 것이다. 마치 사자가 토끼 한마리 잡을 때도 온몸을 던져 잡듯 이판사판의 초강수를 날린다.

▽조치훈이 일본 최고상금(우승 3천3백만엔)의 타이틀 기세이전(棋聖戰)을 네번 연속 우승했다. 명인 혼인보(本因坊)타이틀 까지 3년연속 장악하고 있는 그가 기세이 타이틀을 합쳐 ‘빅3’를 언제까지 거머쥘 것인가.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3시간짜리 승부는 몰라도 이틀에 걸쳐 두는 바둑으로는 당분간 무적이라는 평도 있긴 하다.

▽그가 꼭 강펀치여서 이기는 것인가. 대마 포살(捕殺) 솜씨로만 치면 숱한 능수가 있다. 하지만 조치훈은 ‘은근과 끈기’를 겸하고 있다. 일본 프로기사들은 TV해설을 하면서 늘 ‘시노기(견뎌내기)의 천재’ ‘시쓰코이(끈질기다)’라고 평한다. 초읽기에 몰리면서도 넥타이 풀어헤치고 산발머리 쥐어뜯으며 마지막 한 수를 짜내는 투철한 정신력을 말하는 것이다.

▽독수리같은 공격력과 잡초같은 끈기의 조치훈 바둑. 그런 의미에서 모양과 미학, 그리고 긴 호흡의 기예(棋藝)를 강조하는 일본 바둑세계에서 더벅머리 조치훈은 ‘룰 브레이커(질서파괴자)’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우연히도 일본의 간판 전자회사 소니의 이데이 노부유키사장은 “모든 것이 바뀌고 불확실해지는 디지털시대에는 ‘룰 브레이커’가 아니면 성공하지 못한다”고 외치고 있다. 바둑이나 기업이나 고정관념과 패러다임을 깨야 한다는 명제는 같은 것인가.

〈김충식 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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