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마지막 異人 계훈제

  • 입력 1999년 3월 15일 18시 58분


평생 넥타이를 매지 않고 살았다. 구두 한 켤레도 사 신지 않았다. 작업복이나 한복차림에, 고무신만 신고 다니던 계훈제(桂勳梯). ‘재야(在野)’라는 단어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놀랍게도 그 흔한 해외여행조차 가본 적이 없다고 가족들은 말한다. 일제치하인 중학시절 그의 은사 심인곤(沈仁坤)이라는 분은 늘 밀턴의 저항시를 읊곤 했다. 신사참배도 거부한 그 올곧은 교사는 늘 무명두루마기 차림에 흰고무신만 신었다.

▽어린 제자는 차림새와 사상을 배우고 근대화 물결과 조국 민족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평생 저항 외길을 살게 된다. 학병거부로 평양 교외의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도 일을 꾸몄다. 민족해방협동단이라는 항일단체에 들어가 거사를 계획하다가 45년 광복을 맞았다. 이어 김구(金九)선생을 모시고 신탁통치 반대에 나서게 된다. 60년대이래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줄기차게 앞장섰다.

▽70년대 그리고 80년대에도 감시 연금 수배 도피 투옥의 연속이었다. 스스로 ‘3옥4피(3獄4避)’라고 말하듯 세 번의 옥살이와 네 번의 장기 도피가 삶의 궤적을 드러내준다. ‘거기 산이 있어 오르듯’ 그는 저항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삶을 살았다. 압제와 독재 불의, 무엇에건 대들었다. 비폭력 저항으로, 행동하는 사상가로.

▽화가 아내의 뒷바라지도 있었다지만 돈벌이와는 담쌓고 살았다. 농사도 장사도 해본 일이 없이 저항 ‘외길’을 살았다. 그래서 참으로 위대한 이인(異人)이라고도 한다. 식민지의 아이로 태어나 분단 전란과 독재의 시대를 저항으로 살아 온 그가 78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세기말 어둠속을 가르며 사라지는 운석(隕石)같은 그를 생각한다.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기인 이인의 ‘마지막’은 아닐까.

김충식<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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