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65)

  • 입력 1999년 3월 16일 18시 58분


아버지는 앓고 누워 있던 어느 날 내게 말했다. ‘나는 노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라고. 달력의 처음 두어 달을 찢으면서 어떻게 까마득한 십일월을 예상할 수 있겠느냐고도 말했다. 젊은 날, 익명인 채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서서히 죽어간 동지의 시체를 곁에 두고 자신도 죽어 가면서. 말이나 생각과는 달리 죽음이라든가 감옥이라든가 전쟁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그 속에서는 너무 실감이 나서 장난 같단다. 유리병이 탁자에서 떨어져 깨지듯이 너무나 확실한 사건들. 어어, 저 봐 내가 뭐랬어, 정말 죽는 거잖아. 노년이란 다 빼 먹었기 때문에 없어진 맛의 기억만이 남아있는 곶감 같을 거야. 꼬챙이 끝의 나머지 한 두 개로 야금야금 과거를 되살리면서 연명해 간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의 말년을 이야기했고 그 일이 우리를 가깝게 만들었다.

8

그날 밤이 생각나요. 내가 당신과 입을 맞추었던 그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에 우리는 읍내에 나갔었지요. 몇 가지 살림을 사기로 했잖아요. 모자라는 식기와 냄비며 침구며 살 게 너무나 많았지요. 다릿목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먼지 나는 한길로 걸어갔지요. 도중에 반톤 트럭이 지나 가다 우리를 태워 주었지요. 멀리 읍내가 보일 때까지 우리는 노래를 불렀어요. 당신이 먼저 불렀고 내가 따라서 불렀지요. 그게 아마 당신에게서 배운 ‘사공의 이별’이란 러시아 민요였을 거예요.

노래 부르자 즐거운 노래

이른 아침 안개를 뚫고

내일은 타향 멀리 떠나갈

이 밤을 노래 부르자

아름다운 항구 내일 멀리 바다로

이른 아침에 뱃전을 보니

낯익은 푸른 손수건

당신은 내가 없을 때에도 거의 보름 동안 갈뫼 밖으로 나가지 못했으니 무척 갑갑했을 거예요. 당신이 즐거워 하는 모양을 보니 나는 더욱 안쓰러웠어요. 바람에 당신의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서 너풀거렸죠. 읍내 어구에 나중엔 보기 흉한 시멘트 벽에 똑같은 계란색 페인트를 칠한 농협 창고가 섰지만, 당시에는 흙벽에 초가를 인 방앗간이 있었던 것 기억나요? 언제나 낟가리가 높직하게 쌓여 있었고 곡식 껍질이며 하여튼 먼지들이 주위에 날아 다녔어요. 방앗간 뒤편에 갈대며 부들이며가 울창하게 자라고 그 너머는 산에서 흘러 내려온 개천들이 모여서 머물렀다가 이웃 읍의 강으로 흘러드는 큰 웅덩이가 있었어요.

지금은 저수지가 되어 버렸지만요.

어째서 관공서와 관계가 있는 건물은 모두 똑같이 저런 색인가 몰라.

여러 가지 물감을 자주 쓰는 내가 투덜대며 그렇게 불평을 했더니 당신이 말했지요.

몰랐어? 저건 죽은 독재자가 좋아하던 계란색이래. 일본군 병영의 감각이지.

어머 정말 그건 몰랐네.

화단에 돌을 두르고 흰 페인트로 칠하는 것두 그렇대. 나는 군에서 여러번 그런 작업을 했어. 돌에다 뼁끼 칠을 하다니 상상 좀 해 봐.

그게 그들의 세계라구요.

그래요, 나는 이렇게 당신과의 사소한 대화도 다 기억해 낼 수가 있어. 그 뒤에 당신이 없을 때 어딘가 여행 가서 그런 햐얀 칠을 뒤집어 쓴 돌을 볼 적마다 생각이 났거든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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