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이발소 그림」

  • 입력 1999년 3월 16일 18시 58분


영국에서 ‘철도문학’은 저급한 대중소설을 일컫는 말이다. 산업혁명과 함께 철도가 발달한 이후 여행자들은 열차 안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노리고 등장한 오락성 소설과 잡지가 철도문학이었다. 우리도 주간지와 대중소설이 전성기를 누렸던 70년대가 고속도로 등 교통망이 확충된 시기였다는 점에서 영국의 그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철도문학이란 말에는 깔보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 있지만 문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측면은 인정할 만하다.

▽서구 미술에서 철도문학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키치’다. 화가들이 영리추구를 위해 대중의 기호에 맞게 적당히 그린 작품을 뜻한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것으로 ‘이발소 그림’이란 게 있다. 초가집과 물레방아가 있는 농촌풍경이나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는 새끼고양이 그림 등이다. 아직까지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미술에 안목이 있다는 사람들은 이런 그림을 가치가 없다며 외면한다. 하지만 이 그림들이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보인다. 미술을 잘 몰라도 편안하고 예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점이다. 얼마 전까지 이런 그림들은 미술관과 화랑에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몇몇 화랑들이 이런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를 갖고 있다는 소식이다.

▽미술인들은 이런 전시회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이런 그림에서 전문가들이 말하는 미의식이나 미술적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중의 입장에서 고급문화의 벽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난해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탓이다. 이발소 그림들은 대중을 위해 고급미술이 해내지 못한 역할을 해낸 측면이 있다.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경계구분이 무너지고 있다.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이 고급문화에서도 요구된다.

홍찬식 <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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