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A양 포르노’사건은 요즘 폭발적인 사회적 이슈다. 어느 직장이건, 어느 모임에서건 화제다. 인터넷이나 PC통신에서는 수많은 포르노 관람기가 올라 있고 비난 또는 동정 논쟁이 뜨겁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단순히 진위여부에 대한 궁금증이나 속물적 관음증을 충족시키는 호기심 차원보다 그 이면(裏面)에는 중대한 메시지가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 전해준 불(火)에 비견할 만한 ‘디지털’이라는 테크놀로지. 이번 사건은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삶과 문화를 밑바닥부터 혁명적으로 바꾸어놓고 있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카메라처럼 사용하기 편리한 캠코더, 저렴한 비용에 무제한 가능한 복제기술, 광속에 가까운 정보 유통채널 등 디지털이 가져온 ‘3박자 혁명’이 없었다면 이번 사건은 그저 뒷골목에서나 회자되다가 묻혀버렸을 것이다. ‘A양 포르노’의 확산과정에 대한 심층취재를 통해 디지털 문화혁명의 현실과 문제점을 진단해 본다.》
■소문에서 신드롬까지
이른바 ‘연예인 A양 포르노’(A는 이름 이니셜이 아님)는 그 확산속도와 범위, 사회적 파장이 종전의 ‘연예인 누드비디오’ 사건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가히 ‘신드롬’이라고 할 만하다.
음란비디오 판매상들이 밀집한 서울 세운상가에 A양 포르노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나돈 것은 지난해 12월.
강남의 유명 나이트클럽 지배인(39)은 “지난 해말경 문제의 비디오가 돌았고 현재 나도는 것보다 화질이 훨씬 선명했다”고 확인해줬다.
이후 세운상가의 비디오판매상이 이 테이프를 입수한 것은 올 2월초.
테이프판매상 김모씨(37)는 “테이프를 한 사람이 독점할 수 없는 이 곳의 관례에 따라 판매상들이 전문업자에게 맡겨 대량 복제해 개당 수십만원에 팔았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불과 1개월. 이제 A양 포르노는 사이버 공간을 통해 전국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도 봤다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극장에서는 ‘쉬리’가 최고 흥행을 기록하고 있지만 사이버 공간에서는 ‘A양 포르노’가 단연 인기다.
A양 포르노가 이처럼 사회적 신드롬으로 비화된 것은 인터넷과 CD롬 등 새로운 디지털 테크놀러지를 이용한 뉴미디어의 확산과 맞물려있다. 순식간에, 동시다발적으로, 무한한 세포분열을 가능케하는 기술이 대중화됐다는 얘기다.
A양 포르노가 세운상가의 비디오판매상의 손에 들어갔던 거의 비슷한 시기에 포르노 동(動)영상이 인터넷에 ‘출현’했다는 게 인터넷 전문가들의 설명. 인터넷비평가 이명구(李明求)씨는 “1월말경 포르노사이트 게시판에 A양 포르노 입수라는 내용이 올랐고 얼마후 네티즌들 사이에 E메일을 통한 1대1 거래방식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무한복제시대의 도래
비디오테이프를 동영상파일에 담는 것은 웬만큼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손쉽게 할 수 있는 기술. VCR와 펜티엄급 PC, 동영상복제 소프트웨어(캡처보드 MPEG)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3년전만해도 30만원 이상이던 캡처보드는 최근 10만원 이하로 떨어져 PC에 기본장착품이 될 만큼 대중화됐다.
CD복제는 더 간단하다. 한장에 2천∼3천원 하는 공(空)CD와 CD레코더만 있으면 불과 10여분만에 복제할 수 있다. 화질도 양호하다. 때문에 요즘 시중에는 A양 포르노 CD롬 한장이 대략 1만2천원선에서 팔리고 있다.
네티즌 사이에서는 동영상 압축파일을 E메일로 손쉽게 보낼 수 있고 누군가 동영상파일을 인터넷 자료실에 띄워놓으면 수만명이 한꺼번에 다운로드할 수 있다. 이미 인터넷 포르노사이트에는 A양 포르노의 샘플사진이 전시돼있고 동영상이 유료로 네티즌사이에 판매되고 있다.
최근 일부 대학과 연구기관에서는 몰래 등록된 A양 파일을 다운로드하려는 접속자들이 일시에 몰려 해당 서버가 장시간 접속불능 상태에 빠진 경우도 있었다.
서울의 일부 기업체에는 내부정보망에 A양 동영상이 버젓이 올라있어 직원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고 있다.
세운상가 음란비디오 판매상들이 “재래식 비디오 장사는 이제 종을 치게 됐다”고 울상을 짓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년전부터 나돌기 시작한 ‘B양(이니셜이 아님)누드비디오’는 1년여동안 거의 구전(口傳)에 의해서만 유통됐을 뿐이다.
■사이버테러의 희생자
뉴미디어시대의 부정적 측면에서 보면 A양은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요, 희생양이다. 은밀한 사생활이 사이버공간을 통해 무한으로 복제 확산돼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용산전자상가에는 한 젊은 부부의 정사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나돈다. 어느 부부가 비디오카메라에서 테이프가 빠지지 않아 수리를 위해 수리센터에 맡겨둔 것이 그대로 유통돼버린 것. 8㎜ 비디오카메라가 대중화된 시대, 누구나 A양과 같은 ‘사이버테러’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검찰과 경찰은 A양 포르노비디오를 판매하려던 채모씨(48)를 붙잡아 본격 수사에 나선 것을 계기로 불법 음란물에 대한 특별단속에 나섰다. 하지만 일부 비디오판매상을 잡을 수는 있겠지만 검경의 수사는 오히려 확산속도를 더욱 빠르게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아직 대안이 없다
‘사이버테러’를 막을 수 있는 대책은 무엇일까. 불행히도 현재로선 기술적 대안을 찾는 것 외에 뾰족한 수단이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국과학기술원 이광형(李光炯)교수는 “인터넷이라는 신대륙은 개척기의 서부처럼 총잡이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경찰이 있을 수 없다. 결국 암호나 보안체계 등의 기술만이 보안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중문화평론가 김지룡씨는 “컴퓨터 칩에 인식번호(ID)를 내장한 인텔사의 펜티엄Ⅲ를 통해 인터넷범죄자를 찾아내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이 역시 개인정보 누출이라는 역기능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관련 법규를 강화한다해도 사이버세계의 범죄자를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현재 1백여개가 넘는 한국어 포르노사이트는 대부분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 명의로 등록돼있어 국내법으로는 제재할 수단이 없다.
몇년후 인터넷이 PC 뿐만 아니라 TV와도 연결이 되는 시대가 오면 사이버범죄의 심각성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