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69)

  • 입력 1999년 3월 21일 18시 26분


그리곤 기껏 살아있는 대상을 그린다는 게 누드예요. 생활이 없는 몸의 선은 그야말로 물체와 다를 게 없잖아요. 그거 몇번 하다가 대번에 물감으로 떡칠하고 작가 행세로 넘어가는 거예요. 나는 그의 눈이 만성 피로 환자처럼 충혈되어 있는데도 눈매는 강렬하다고 느꼈죠.

나 여기서 한 장 골라 가져도 된다면, 아침으루 순대국 살게요.

가지슈.

내가 고른 건 유쾌한 모습의 부랑아 소묘였지요. 젖 먹이는 아낙네도 좋았지만 활기는 그 거지 아이들이 더 생기 있었거든요. 나는 그를 데리고 근처 시장 골목에 있는 순대국 집으로 갔어요. 그는 어슬렁어슬렁 뒤를 따라왔어요. 사실 나는 그 식당에 꼭 한번 가 보았을 뿐이었는데 같은 과 친구들이랑 무슨 모임을 끝내고나서 남학생들을 따라 갔었지요. 그래서 남학생들이 순대국과 소주를 매우 좋아 한다는 걸 알았어요. 입구에는 찢어진 치마같이 너덜너덜한 헝겊이 늘어져 있고 거기에 순대국, 머리 고기, 삼겹살, 왕대포 같은 글씨가 삐뚤빼뚤 써있었죠. 안에는 더러운 나무 탁자와 길다란 널판자로 만든 간이의자, 그리고 즉석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을 수 있도록 드럼통을 엎어 놓고 구멍을 뚫어 연탄을 피워 놓은 식탁과 주위에 동그란 오리의자 몇 개가 있잖아요. 나는 먼저 순대국 하나만 시켰어요.

왜 한 그릇만 시키는 거요?

그가 볼멘 소리로 묻더군요.

난 아침 먹구 왔어요.

그렇게 일찍?

물론이죠. 새벽에 일어났으니까.

그럼 안되겠는데… 이건 뭐 개밥 먹는 것두 아니구, 나하구 소주 한 병만 대작해 주는 조건이라면 밥을 먹겠어.

소주는 못해요.

저기 써 있는데, 왕대포 한 잔씩?

나는 차림표가 붙은 뒤의 벽을 힐끗 돌아보았어요.

좋아요.

그는 천천히 국밥을 먹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정말 기적 같이 큰 사발로 나온 막걸리를 술술 마셔 버리는 거예요. 콧등과 이마에는 땀을 송송 달고서.

옛날부터 술은 석 잔이라구 했는데 이게 뭐요. 감질나게….

나는 백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죠.

좋아요. 단, 스케치하러 가는데 날 데려간다면요.

그래서 우리는 왕대포 석 잔씩을 마시게 되었어요. 그는 서슴없이 요란하게 트림을 꺼억, 하더군요. 그는 조금 불콰해졌지만 기분이 아주 느긋해진 듯했어요. 나두 우리 아버지의 딸이라서 막걸리를 한 주전자쯤 마신 셈인데도 눈자위만 화끈거렸지 말짱했지요.

제법 센데.

그는 나를 돌아보며 한마디 하고는 내가 돈을 내는 것두 기다리지 않고 휭하니 나가 버리더군요. 나두 계산을 하고나서 바삐 뛰어 나가니까 그맘때 쯤에는 등교하는 학생들이 길을 꽉 메우고 있잖아요.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 가면서 속으로 이젠 쪽이 다 팔리겠구나 싶었죠. 그가 나를 어디로 데려갔겠어요. 글쎄 하필이면 중앙시장이 있는 염천교 다리 위예요. 남대문 방향으로는 철공소와 철근 상점이 늘어섰고, 다리 북쪽은 잡다한 시장이구요, 남쪽으로는 철길이 복잡하게 얽히고 증기 기관차들이 오락가락 하고 더러운 개천과 판잣집들이 보이고, 그 때는 철로변에 웬 까마귀들이 그리 많았는지.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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