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나는 21세의 풋내기였다. 맡은 역할은 선배들의 기록향상을 위해 중반까지 전력을 다해 선두를 이끌다 포기하는 페이스메이커에 불과했다.
그러나 완주 경험조차 없었던 나는 김재룡 이창우 선배에 이어 당당 3위(2시간12분35초)로 골인했다. 1위인 김재룡 선배와 나의 기록차는 1초에 불과했다. 이창우 선배와는 사진판독으로 순위가 갈렸다.
굳이 8년전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은퇴 3년만에 마스터스 자격으로 풀코스를 다시 뛴 21일 제70회 동아마라톤대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지난달 동아마라톤 조직위원회로부터 풀코스 제의를 받았을 때 나는 가슴이 뛰었다. 그동안 가슴속에 꼭꼭 숨겨뒀던 비밀. 남의 눈을 피해가며 한강 둔치를 달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그러나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굳이 조건을 달았다. 현역복귀라는 단어는 쓰지 않을 것, 국민과 함께 뛰는 ‘사랑과 우정의 마라토너’로 부각시켜 줄 것.
그러나 내 몸속에는 본질적으로 승부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훈련기간이 워낙 짧았다. 초조한 마음에 무리를 하기 시작했다. 대회가 다가올수록 밤잠을 못 이루는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동생의 결혼식을 치르고 난 뒤 대회 사흘전 급기야 급성 장염이 왔다. 마무리 훈련을 하기 힘들 정도로 심했다. 결국 대회 당일날 아침을 굶고 말았다.
걱정이 됐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황영조가 다시 달리면 등록선수들을 제치고 1등을 할 것이라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리 실망을 안길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막상 달려보니까 뛸 만했다. 몸상태는 의외로 가뿐했다. 5㎞를 20분내에 끊는 속도로 25㎞지점까지 페이스 조절을 했다. 나에겐 편안하게 달리는 조깅 스피드에 불과했지만 일부 여자 등록선수들을 추월할 수도 있었다.
같이 레이스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무리를 지어 달렸다. 나는 달리면서 계속 얘기를 했다.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도 하고 마라톤 기술에 대한 ‘강의’도 했다.
경주시민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역시 황영조는 마라톤을 할 때 가장 황영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기록보다는 완주가 목표였지만 이번 대회에서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가능성을 확인했다. 30㎞지점을 지나서부터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피멍울이 생기고 발목이 저려왔지만 이 정도면 제대로 훈련만 한다면 예전의 스피드를 되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꾸준히 몸관리를 해온 덕분이었다.
다음날 아침 회복도 빨랐다. 선수시절 같으면 사흘쯤 몸살을 앓았을테지만 잠에서 깨어나니 몸이 개운했다. 어느새 내 마음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대표선발전을 겸한 내년 동아마라톤대회가 열리는 경주로 달려가고 있었다.
황영조<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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