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배인준/무늬만 고운 말들

  • 입력 1999년 3월 25일 19시 12분


스쿨존(학교주변 어린이보호구역).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따뜻함이 감도는 말이다. 95년 9월 정부는 스쿨존제도 본격실시계획을 발표해 크게 환영받았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주변을 교통안전지대로 특별관리해 어린이들을 교통사고로부터 보호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의 최근 조사결과는 너무도 실망스럽다. 말만 스쿨존이지 안전시설 미비와 관리 소홀로 학교주변의 어린이 교통사고가 줄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기야 구호(口號)에 그치는 것이 어디 그 뿐인가. 겉과 속이 다른 정책과 제도가 넘치다보니 스쿨존이란 것도 관계부처들이 예산 많이 따내려고 고안해낸 탁상작품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그러면서도 스쿨존은 정치적 구호들에 비하면 훨씬 절실한 현실문제여서 지금부터라도 관계기관과 시민들이 좀더 노력해 실효(實效)를 거두었으면 싶다.

▽무늬는 그럴듯하지만 가장 공허하고 소모적인 말은 역시,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적 구호에 많은 것같다. 정권의 한시적 ‘세입자(貰入者)’가 바뀔 때마다 새롭게 내세우는 통치철학이니, 국정이념이니 하는 것들 가운데 그런 게 많다. 가장 가까운 전(前)정권인 김영삼(金泳三·YS)정권의 경우는 ‘신경제’ ‘세계화’ ‘역사 바로 세우기’ 등으로 이어나간 구호들을 국제통화기금(IMF)에 매몰시키면서 막을 내려야 했다.

▽현정권마저도 몇년 뒤에 YS정권과 비슷한 ‘구호의 몰락’을 맞는다면 그것은 정권의 비극이기 이전에 국민적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金大中·DJ)정부가 강조하는 ‘DJ노믹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 ‘제2의 건국’ 등이 시험대에 올려져 있는 상황이다. 이미 곳곳에서 빨간 점멸등이 켜지기 시작한 ‘개혁’도 마찬가지다.

〈배인준 논설위원〉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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