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73)

  • 입력 1999년 3월 25일 19시 12분


그는 이젠 머리를 긁지 않았습니다.

집으루 갈 거요.

집이요?

학교 말이오.

나는 화가 난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서 버스에 올라탔어요. 이게 내가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이야기예요. 그가 다시 아버지에게 찾아갔는지 나는 묻진 않았지만 그는 졸업한 선배의 화실에 나가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우리는 정말 가난했습니다.

그 해 일년 동안 그와 나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어요. 우리는 폐허 같은 집을 등지고 길에 나서서 땀 흘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을 그리러 다녔지요. 겨울에 나는 그와 함께 서해안의 어느 섬으로 짧은 여행을 갔습니다. 바람이 몹시 불었어요. 폭풍 경보가 있었고 오가는 배는 모두 끊겼어요. 우리는 해변에서 조금 들어간 마을에서 민박을 했는데 섬에는 전기도 없었어요. 거기선 당신과 내가 갈뫼에서 그랬던 것처럼 촛불을 켜고 지냈어요. 등산용 버너와 코펠도 가지고 갔는데요 우리는 마지막 날 저녁에는 문간방의 아궁이에다 쇠 솥을 걸어 놓고 멸치를 듬뿍 넣어 수제비를 끓였거든요. 바깥에선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어요. 당신두 그 노래 기억 하죠? 우리가 어렸을 때, 집집마다 제법 진공관 라디오가 퍼졌을 무렵에요, 밤이 되면 어른들 틈에 끼어 앉아 연속 방송극을 듣기도 했잖아요. 이젠 줄거리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노래는 기억해요. 그 노랠 들으면 어릴적의 겨울이 생각나거든요. 이런 얘기를 아마 그에게도 했을지 모르는데. 눈이 내리는데 산에도 들에도 내리는데 모두가 세상이 새하얀데 나는 걸었네 님과 둘이서 밤이 새도록 하염없이 하염없이 지금도 눈은 내리는데 산에도 들에도 내리는데 모두가 세상이 새하얀데. 어두워서 끓는 솥 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와 나는 반죽을 한웅큼씩 들고 눈이 들이치는 아궁이 앞에 머리를 모으고 앉아 떼어 넣었지요.

그는 졸업을 하자마자 군대에 입대를 했어요. 나는 그 무렵의 다른 여자들처럼 신새벽에 용산역으로 나가서 논산으로 내려가는 그를 배웅했구요.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 보다는 운이 좋았어요. 졸업 하면서 공모전에 낸 그의 작품이 대상을 받았거든요. 그는 특출한 재주가 있었고 다른 동년배에 비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성숙했으니까요. 참, 그의 아버지는 진작에 알콜 중독으로 세상을 떴어요. 시립 병원에 버려진 주검을 그가 찾아내어 고향으로 모셔 갔다고 해요. 내 아버지도 그 이듬해인가 돌아가셨어요. 아마 그 와중이었을 거예요. 나는 동부전선에 있는 그에게 면회를 갔답니다. 강원도 산골짝에는 외길이 꼬불꼬불 끝 간 데가 없는데 작업하는 군인들은 더러운 누비 옷을 입고 산 골짜기에서 나무를 하거나 땅을 파고 있었죠. 어느 말단 부대 위병소 앞에 가서 그를 찾아 달라고 했어요. 흙 투성이의 얼굴이 시커먼 늙은 농부처럼 변한 그가 터덜터덜 부대 앞 길로 내려오는데 나는 그만 눈물이 왈칵 치솟았어요. 사월이 지났는데도 골짜기마다 눈이 아직 녹지 않았고 양지바른 곳에는 진달래가 발갛게 피어 있었지요.

그가 외박 허가를 받았대요. 밖에 나가서 자고 들어와도 좋다는 거예요. 면회를 간 사람이 누구든 간에 젊은 여자가 찾아가면 자고 들어오라는 군대의 명령이 참 무지막지하다구 생각 안드세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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