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75)

  • 입력 1999년 3월 28일 19시 24분


그러나 그의 그림은 옛날 학교 실기실에서 침낭에서 기어 나오던 무렵의 그런 힘과 생기를 가진 그림이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가 칭찬 받은 그림들은 대부분 선배들의 생각을 날렵하게 다른 모습으로 엇바꾼 형상들이었죠. 내 생각에 그의 그림은 하나의 아이디어였다고나 할까. 몇 달 동안 소식이 끊겼던 그가 전화를 했어요. 친구가 생겼는데 소개를 시켜주고 싶다구요. 그래서 그를 오랜만에 만났죠. 호텔 커피숍에서 그들을 만났어요. 내가 들어서니까 저쪽 창가에서 웬 말쑥한 월급쟁이 차림이 불쑥 일어났지요. 나는 몇 달만에 그를 만나기도 하고 그의 모습이 너무나 달라져서 몰라볼뻔 했습니다. 그의 텁수룩하던 머리는 말쑥하고 단정하게 다듬어져 있고 기름도 적당히 발라 윤이 났지요. 물론 수염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더블 버튼의 신사복에 넥타이를 꼭 조여 맸구요.

오랜만이야.

하고 그는 묵직하게 말했어요. 나는 그의 아래 위를 찬찬히 훑어 보다가 웃음을 참지 못했죠.

형, 사장 같다 사장 같애.

그는 마주 웃지않고 다시 묵직하게 말했어요.

요즘 재미 좋아?

나는 더욱 웃음이 나왔지요. 무슨 브로커 같은 말투 잖아요. 그러나 빈정대지는 않았어요.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와의 작별에 대해서 내쪽이 무슨 적개심이라도 가지고 있는줄 그가 오해할까봐서 말이에요.

형 친구는…?

음 곧 올거야. 어때, 그림은 잘 돼?

뭐 그냥. 지난번 국전 둘러봤어.

어땠어, 느낌이.

나는 그가 자기 그림에 대한 느낌을 묻는 일이 좀 뻔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젠 아무 내색도 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었거든요.

뭐 큰 상두 받았구, 좋든데… 자신이 가장 잘 알잖아?

글쎄 말야. 우리 그림쟁이들 가장 큰 약점이 손재주는 있는데 철학이 없는 게 젤 문제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가 우물쭈물 하면서 말했어요.

실은 나 지난 주에 약혼했어.

아무렇지도 않다고 가슴 속 말로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약간의 충격이 지나갔어요. 헌데 참, 사람의 관계는 쓸쓸한 일이죠. 유행가에도 늘 등장하지만 두 사람이 지니고 있던 온갖 감정과 느낌의 배경이 젖혀지고 나면 세상 속에 그들의 삶의 알몸이 들어나 버리거든요. 저 알 수 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어둡고 두려운 미지의 길들. 종이 인형에 갈아입힐 의상을 제 마음대로 색칠하고 디자인하고 가위로 오려내어 상자갑 안에 채곡채곡 쟁여 두고는 하지요. 얼굴과 몸집만을 내놓고 그것들을 차례로 입혀 보고 다시 벗기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오랜 뒤에 그 상자를 열어 보면 예전에 그린 색깔과 디자인은 초라하게 변해 있죠.

잘됐네요. 정말 축하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닭털 침낭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갈라터진 손 등의 핏자욱도. 그는 이제 막 보상 받기 시작하고 있거든요.

다음 달에 같이 유학 갈 거야.

그는 자기 약혼녀에 관해서 성의를 가지고 설명을 했어요. 뭐 빤하잖아요. 멜로 영화에 많이 나오는 줄거리. 흔하다는 건 바로 당대의 생활 반영이라면서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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