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76)

  • 입력 1999년 3월 29일 19시 06분


장래를 촉망 받는 가난한 젊은이와 부잣집 따님의 결혼이며 유학이며 그리고 과거와의 결별. 우리가 별로 할 말이 없어질 맞춤한 시간에 그의 약혼녀가 왔어요. 그 처녀는 아마 대학을 갓 졸업했을 거예요. 아직 사은회 축제의 느낌이 남아 있었으니까. 분홍색의 단추가 많이 달린 파티복 같은 실크 원피스를 입고 눈 화장이며 볼 연지까지 했구요. 약혼녀는 고개를 까딱 하면서 가볍게 인사를 했어요. 그네는 우선 남자로부터의 소개를 기다리는듯 했지요. 내가 먼저 재빨리 말해 버렸죠.

한윤희라구 해요. 형 후배 되구요. 만나서 반가워요.

저두 오빠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뵙구 싶었어요.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다른 데로 자리를 옮겼지요. 가볍게 술도 한 잔씩 했구요. 차츰 그가 거북스러워 하는 것 같아서 나는 먼저 일어서겠다고 했더니 그가 따라 나왔어요. 로비에서 택시를 잡으려는데 그가 등 뒤에서 말하더군요.

고마웠어.

나는 그를 잠시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러군 나직하게 물었어요.

뭐가요…?

나한테 잘해줘서.

나는 정말 진지하게 말했어요.

형, 씩씩하게 잘 살아.

이렇게 우리의 영화 한 편이 끝났습니다. 내가 이런 얘길 세세하게 적어 놓는 건 그 시대에 꿈이네 야망이네 성공이네 하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던 생의 시시함에 대하여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예요.

9

또 하루가 저물었다. 다시 저녁 숲의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개 짖는 소리가 더욱 고즈넉해졌다. 내가 방을 나와서 툇마루에 앉아 신을 꿰는데 울타리 사이로 보람이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밥 먹으러 오래.

응 문보람이 왔구나.

계집아이는 어제처럼 핑 하니 달아나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다.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조막손을 쥐었다. 차고 작은 손가락들이 내 손아귀에서 꼼지락거렸다.

보람이 오늘 뭘하구 놀았나?

엄마하구 나물 캐러 갔다왔어.

많이 캤니?

응 나는 쪼끔 캐구 엄만 이만큼.

아랫집 울 안에 들어서니 부엌에서 내다보던 순천댁이 반색을 했다.

얼릉 오소. 아까 잠깐 올러갔더니 아무 기척이 없어서 잠든줄 알었당게.

내가 찬방으로 올라갔더니 밥상은 독상이었다.

왜요, 모두 어디 갔나요?

아녀, 우리 식구들은 벌써 묵었제.

부엌에서 밥 식기와 국을 들여 놓고 순천댁은 내 밥상머리에 앉았다.

보리국 좋아 하지라?

어, 이건 참 오랜만에 먹어 보는데요.

그거이 봄 맛이지라.

순천댁은 한동안 잠자코 앉았더니 긴 숨을 내쉬고는 말을 꺼냈다.

저 머신가 아까 낮에 일은 참…미안시럽게 되았는디.

예? 무슨 일요….

저어 서에서 나온 사람 만나지 않았어라우?

아 네에, 별 일 아닙니다.

순천댁은 공연히 방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고 손 끝으로 치마귀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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