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78)

  • 입력 1999년 3월 31일 19시 16분


나는 다시 윤희의 목소리로 돌아간다. 이제는 그네의 만년필 글씨가 너무 익숙해져서 꼬물꼬물 살아서 나직한 음성으로 변하는 것이 보인다. 글씨에는 감정의 흐름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슬프면 글씨의 자체에 잉크의 흐름이 연해지며 나약해지고 기쁠 때면 둥글고 활달하게 이어지고 격정이 일어나면 펜을 꾹꾹 눌러 쓴 흔적이 획의 끝에 남아 있었다. 노트의 뒷면에는 때때로 주위 사람들에게 보낸 듯한 편지초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들도 찬찬히 들치면서 읽어 보았다.

정희에게

잘 있었니? 나 지금 갈뫼에서 여름을 보내구 있어. 선생 노릇도 이걸루 끝이라구 생각하구 있지. 나는 사실 작년에 아무도 몰래 결혼을 했어. 너에게도 말 할 수 없었던 걸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이는 이를테면 활동가야. 너희들 또래들 말로 한다면 운동권이지. 그러나 이론적이고 딱딱하게 굳은 사람은 아니야. 대개 사회적 보상 욕구가 큰 가난한 젊은이들이 작은 동아리를 만들고 거기서 권력을 실험하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재빠르게 자기 변신을 하는데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야. 좀 얼뜨기라고나 할까. 주제에 다 늦게 시인 지망을 하구 있대. 고집은 몹시 센 것 같아. 아, 고생문이 훤한 인연이었어. 그는 작년에 여길 떠나자마자 체포됐어. 아마 오랫동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될지두 몰라. 그런데 난 그의 아내를 자청하려고 해. 왜냐구? 그에게는 나밖엔 아무도 없기 때문이야. 나 공부를 좀 더 해보려구 작정하구 있어. 아무래두 혼자 오랫동안 살아가야 할테니까. 대학원 갈 준비를 해 볼 작정이야. 넌 아버지의 마지막 해를 잘 모를거야. 그때 너는 입시생이었으니까 정신이 없었겠지. 나는 아버지와 거의 날마다 하루를 보내곤 했어. 아버지는 간암이었기 때문에 돌아가시는 날까지 정신이 또렷하셨어.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구 마지막 며칠 간과 돌아가시기 직전까지의 일들은 나중에 모두 자세히 적어 놓으려구 해. 너두 기억해 두기 바란다. 여기 갈뫼에서 나는 혼자 있는 게 아니야. 어머니에게 아직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네게 부탁할 일이 많이 있을 거야. 네가 나를 도와줘야 해. 지금은 무슨 일인지 궁금하겠지만 나중에 알게 되겠지. 아마도 이번 가을쯤에는. 네가 이곳으로 달려오지 않는다고 약속해준다면 내 말할게. 나는 그 전엔 몰랐어. 그냥 전과 같은 여자로 다들 살아가는줄 알았지. 헌데 그렇지가 않아. 알이 깨어 애벌레가 되고 애벌레는 고치를 짓고 번데기가 되잖니. 고치 속에서 번데기는 다시 오랫동안 긴 잠을 잔다. 그런데 고치를 부시고 나와 껍질을 벗고 고운 날개를 가진 나비로 변해서 푸르른 창공을 날아갈 즈음에는 이 나비는 그 전의 벌레가 아닌 것처럼. 어머니가 된 여자는 그 전의 여자가 아니야.

정희에게

제발 그러지말라고 내가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네가 오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마당 귀퉁이에 심은 해바라기며 과꽃이 활짝 피었어. 햇살은 차츰 엷어지고. 요즈음 저녁나절에 석양 속으로 고추 잠자리가 빗겨서 날아다니는 걸 보면 벌써부터 눈보라치는 겨울 날이 생각나. 겨울에 저 안은 몹시 춥다는데. 우리는 잘 지내구 있어. 내 몸의 변화가 신기할 정도야.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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