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중견사원 김상민과장(37)의 하루 일과는 컴퓨터로 시작해 컴퓨터로 끝난다. 아침에 출근하자 마자 컴퓨터 E메일에서 그날의 회의일정이나 상사로부터의 업무지시, 타부서의 업무협조 요청, 사적인 약속 등을 확인한다. 인터넷을 통해 업무처리에 필요한 자료를 찾은 뒤 완급을 따져 급한 것부터 E메일로 응답한다. 다음은 사내 전자게시판 검색. 공지사항이나 복리후생 정보, 사내 장터나 계열사의 상품 판매정보를 읽는다.
출장 때는 남에게 자신의 E메일까지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부재중에 온 E메일이라도 응답하지 않으면 업무태만으로 낙인찍히는 수가 있다. 긴장된 나날이지만 때론 ‘딴짓’도 한다. 대화방에 들어가 채팅을 통해 세상돌아가는 얘기를 듣거나 인터넷으로 주식투자나 어학공부를 하면서 실속을 차리기도 한다.
인터넷이 기업문화를 이끌고 있다. 각 그룹이나 기업들이 모든 업무를 종합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그룹웨어를 속속 도입해 직장을 ‘인터넷 공동체’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 그룹웨어는 전 직원이 사내 통신망을 이용해 전자우편 전자회의 문서관리 업무관리 작업흐름관리 등을 모두 처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 포항제철과 삼성그룹이 가장 앞서 기업경영에 도입했다.
포철은 마이포스(MIPOS)라는 그룹웨어를 통해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한편 팀장급 이상은 컴퓨터모니터로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전화하는 영상전화시스템까지 갖추고 있어 사무실에 종이는 물론 전화까지 사라지고 있다.
삼성그룹도 자체 그룹웨어시스템인 싱글로 20여만명의 전 직원을 하나로 묶고 있다. 삼성직원이 있는 모든 곳엔 싱글이 연결돼 있어 그룹의 각종 캠페인 등도 통신망을 통해 하고 있다.
그룹웨어 시스템을 구축하면 보고와 지시가 온라인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업무속도가 매우 빠르고 비용절감에도 한몫한다. 삼성그룹의 경우 사내 네트워크 싱글을 이용한 후 통신비용이 최고 90%까지 절감됐다.
이같은 인터넷의 생활화는 사내 상하관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정보의 바다’ 인터넷만 통하면 위 아래 구분없이 모두가 정보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 E메일로 사내 누구와도 직접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어 과거 조직상의 수직관계가 수평관계로 바뀌고 있는 것도 새로운 추세.
이제 인터넷 실력은 업무능력의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수출입업무를 담당하는 종합상사의 경우 해외업체들의 인터넷사이트를 얼마나 많이 확보해 적극적으로 E메일을 주고받느냐가 수출실적을 좌우한다. 최근 삼성물산 등 일부업체에서는 인터넷으로 실적을 쌓은 사원을 파격 승진시키는가 하면 대부분의 기업들이 인터넷 자격증을 인사고과에 반영하고 있다. 인터넷 공동체에서는 확보한 정보의 양이 개인의 능력을 좌우하게 됨에 따라 ‘조직민주화’를 앞당긴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넷맹세대’인 중년간부들이 받는 스트레스도 크다.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터넷에 능숙한 후배들에게 뒤져 명퇴대상으로 지목될까봐 남모르게 인터넷과 씨름하기도 한다. 한 종합상사의 이모부장은 “모든 일을 컴퓨터로만 처리하다보니 상하, 동료간의 대화가 뚝 끊겼다”며 “후배들이 인터넷에서 내가 모르는 정보를 구해 열심히 윗사람의 E메일로 보고할 때에는 단절의 서글픔마저 느낀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무언의 E메일’이 직장내 커뮤니케이션 창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조류다. 업무지시는 물론 상사와 부하직원간의 대화나 토론, 개인적 불만이나 사적 서신까지도 전달할 수 있는 인터넷은 앞으로 더욱 빠른 속도로 우리 기업문화를 변화시킬 것이 틀림없다.
〈이영이기자〉yes20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