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래된 정원 (83)

  • 입력 1999년 4월 6일 19시 22분


제목은 이래요. 이용악의 시집인 ‘낡은 집’과 괴테의 ‘젊은 벨텔의 슬픔’ 그리고 체홉의 ‘골짜기’였지요. 책장을 들쳐보니 안에 조그맣고 예쁜 글씨로 단기 사천 이백 팔십일년 김순임이라고 씌어 있었어요. 단기로 쓰는 게 유행하던 무렵이니까 천 구백 사십 팔년이더군요. 잉크는 번지고 변색했지만 손의 흔적이 명료하게 남아있는 이름, 김순임. 그리고 녹슬고 찌그러진 탄피에는 종이로 두르고 거기 뭔가 깨알처럼 적고나서 스카치테이프로 붙였어요. 나는 그 작은 글씨를 읽었어요. ‘지리산 등반 중에 1969년 봄.’ 탄피의 앞에 꽂혀있던 탄환은 어디로 날아갔을까요. 아버지는 탄피의 윗 부분에 작은 구멍을 내어 은단처럼 생긴 줄로 목걸이를 만들었어요. 한때는 아마 목에 걸고 계셨을 겁니다. 책과 이 탄피는 오랜 시차가 생기니까 아무런 관계가 없겠지요. 다만 저 책의 임자인 김순임과는 어떤 사이였을까. 해방 직후에 만난 그들은 사랑을 했을까요. 아니면 오르그에서 만난 동지였을까요. 아버지는 부상 당한 동지들을 남기고 급박하게 적전 후퇴를 할적에 서로 쏘아 주었다는 말을 한적이 있었는데. 또는 환자트에서 살아날 가망없이 고통 당하는 동지를 위해서도. 아버지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의 산행에서 그냥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예전 싸움터의 흔적을 집어 왔겠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추억이 그 탄피를 주워다 간직하게 만들었을 거예요. 추억의 내용이 뭔지 알 수 없는 일이죠. 나는 아버지가 간직했던 탄피와 책을 소중히 보관하구 있어요.

그런데…아, 한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군요! 아버지는 앓던 무렵에 갑자기 감을 사오라구 하셨어요. 물론 감이 나오기는 이른 철이라 내가 되물었지요.

홍시요, 단감이요?

땡감을 찾아봐라. 그거 소금물에 담갔다 먹으면 더 맛이 좋단다.

아버지에게는 야채와 과일이 좋다고 해서 제 철 과일은 물론 당질이 많은 파인애플이나 수입 열대과일들도 어머니가 사들여 오고 있었거든요. 나는 시장에 나가 아버지가 일러준 그런 땡감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잘 포장된 단감만을 사가지고 돌아왔어요.

아버지 요새는 땡감이 없대요. 카바이트인가 뭔가로 아예 떫은 감을 연시로 만든다든데 뭐.

응 그래야 상품이 되겠구나. 촌에는 있겠지.

요즘은 애들두 그런 건 안먹을 거예요.

아버지는 단감을 손에 쥐었다 놓았다 하면서 들여다보았어요.

아버지 감을 잡수시려는 게 아니라 감상하려구 그러시죠?

왜 그러면 안된다든? 가을이 보이잖니.

하고는 한참이나 감을 바라보다가 아버지는 내게 물었어요.

너 화가니까 내 재미있는 가을 얘길 들어볼래?

아버지는 해방 이후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건준에 들었대요. 그리고 조공이 성립되면서 입당하게 되지요. 그때는 건준에 기웃거리기는 했어도 별로 할 일 이 마땅치 않아 출판사 근처에서 번역 일을 하거나 공장의 야학 모임에서 강사 노릇을 했다지요. 국대안 반대 사건과 영남의 시월 투쟁 무렵부터 아버지의 활동이 치열해졌지요. 아버지는 그 해 추석에 서울에서는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진 쌀을 구하러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글: 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