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85)

  • 입력 1999년 4월 8일 18시 53분


아이, 댁에 가지구 가시던 걸.

여기 주전자에 물도 있으니까 걸리지 않게 천천히 먹어요.

그래서 그들은 인절미를 세 개씩 먹었답니다. 그러고나서도 날이 새지를 않아서 한참이나 앉았다가 아버지는 다시 륙색에서 감을 꺼내어 내밀었대요.

시골에서 따온 건데 맛이나 한번 보오.

여학생은 못이기는 듯이 받더니 아주 조금씩만 베어 먹더랍니다. 아버지가 보기에 얌전을 떠는 건 이해를 하겠는데 감 한 알을 들고 꼭 쥐가 쏠 듯이 앞니로 조금씩 떼어먹는 모양이 그리 좋지는 않았대요. 그래서 아버지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마 아껴 먹느라고 저러는 모양이다 그랬대요. 어쩐지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다시 륙색에서 감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어요.

하나 더 들어보우.

아버지의 권유에 여학생은 그냥 얌전히 받아서 가지고만 있더래요. 화로 가에서 졸고 앉았다가 잠이 깨어 보니 그네는 언제 갔는지 방에 아버지 혼자 남았고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어요. 그네가 앉았던 맞은편 자리에는 쪽지가 한 장 남았더랍니다. 리본으로 엮은 옛날 식 쪽지 말이죠.

선생님 곤하게 주무시는 것 같아 먼저 일어납니다. 뜻하시는 사업 잘 되시기를 빌겠습니다. 어느 일터에서든 다시 만나 뵙게 되기를 바라면서….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감을 한 입 베어 물다가 너무도 떫어서 그만 몇번 씹지도 못하고 뱉어버리고 말았답니다. 그때는 아직 새댁이던 엄마가 곁에서 아버지의 오만상을 찌푸린 몰골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지요.

땡감을 그렇게 마구 드시면 어떡해요. 소금물이나 쌀 뜨물에 며칠 동안 담갔다가 먹어야지.

이게 뭐라고?

땡감, 이걸 한 스무 날 양지바른 곳에 두면 홍시가 되구요 소금물에 담그면 며칠 안가서 먹을 수도 있구 그래요.

그제서야 아버지는 기차에서 만난 여학생이 아주 조금씩 베어 먹던 이유를 알아차렸지요. 그네가 대단하지요? 글쎄 한 입도 못 넘길 그 떫은 감을 호의를 생각해서 참고 끝까지 다 먹으면서 아무런 표도 안냈으니까. 아버지의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그네는 그리 예쁜 편은 아니었다죠. 못생겼다는 말은 안했지만 참 대견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어요.

아버지는 이듬해 봄에 그네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해방 이후 가장 크게 좌우익이 격돌한 사십 칠년의 삼일절이었어요. 제주도에서는 사삼 항쟁의 시발이 되었고 전국적으로 파업과 항쟁과 살육이 시작 되었어요. 남산에서 삼일절 행사를 마친 민전 전평 민청 등의 좌파는 남대문 시장 초입 쪽으로 내려오고, 서울운동장에서 행사를 마친 우파는 조선은행 앞으로 해서 경시청 앞을 지나 남대문쪽으로 행진해 오다가 양측이 남대문 앞의 오거리에서 충돌을 하게 되지요. 그날 아버지는 행진하는 군중에 섞이지 않고 보도를 따라서 함께 내려오고 있었는데 시위 군중의 중간 쯤에 플래카드를 들고 걸어가는 그네를 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얼른 차도 쪽으로 나가서 빠른 걸음으로 그네와 나란히 걸었답니다.

오랜만이오. 나 알아 보겠소?

네 선생님….

지난번에 땡감 먹인 걸 사과하오. 난 정말 몰랐어요.

그랬더니 그네는 입을 가리고 웃더랍니다. 바로 남대문이 바라보이는 지점에서 행렬이 멈추고 곧 우파의 공격이 시작되어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답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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