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86)

  • 입력 1999년 4월 9일 19시 54분


총성도 들리기 시작했구요. 군중들은 사방으로 뻗은 길을 따라 뿔뿔이 흩어지고 부상자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전차 길 위에 쓰러지구요. 아버지는 그 순간에 여학생과 헤어졌답니다. 뒤에도 그네가 무사했을지 걱정이 되었대요. 내가 물었지요.

그게 아버지의 가을 이야기로군요. 다음에 그 분을 만나셨나요?

같은 진영이었으니까 물론 만났지.

몇번이나요?

그 동무는 죽었지.

그게 아버지의 대답이었고 더 이상은 말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한번 입을 다물면 아무리 물어도 같은 대답 뿐이니까요. 어쩌면 저 책의 임자인 김순임이란 이가 그네일지도 모르고 탄피에 얽힌 기억은 그네의 기억일지도 모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경험 수준에서의 이야기지요.

당신에게 하고픈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거의 다 해버린 것 같군요. 나는 아버지의 땡감을 부러진 가지와 시든 잎이 붙은채로 몇번이나 그려 본적도 있습니다.

10윤희는 자기 동생에게는 딸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으면서도 지난 세월 동안 풍편에라도 나에게 닿는 걸 차단하려고 애썼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기록에서도 언급하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이 보였다. 그건 아마도 갇혀있는 나에게 정신적으로라도 기대어서는 안된다는 작심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도 딸이 있다. 윤희가 세상에 남겨놓은 갈뫼의 아이.

여기 와서 나는 단 하루도 깊숙하고 죽은 듯한 잠에 빠져보지 못했다. 또 하루가 지나갔다. 나의 공간감은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취사 준비를 시작했다. 작은 냉장고에 가득 채운 식품들 가운데서 일부러 생선이며 푸성귀들을 꺼내어 매운탕 끓일 준비를 했고 전기밥솥에 쌀을 안쳤다. 한참 가스 렌지 앞에서 부산을 떨고 있는데 마당에서 신 끄는 소리가 들렸다. 내다보니 순천댁이 광주리에 무엇인가 담아서 머리에 이고 들어서는 중이었다.

사모님 어서 오십시오.

잘 주무셨소. 내가 무얼 쬐끔 갖고 왔는디라 좀 잡숴 보소.

순천댁은 찬마루에 걸터앉아 광주리를 부엌 마루에 내려놓고 덮은 신문지를 들췄다.

마늘쫑하고라, 깻잎, 이건 열무김친디 아주 싱싱하구먼. 그라고 된장 고추장도 퍼왔는디 맛이나 좀 보시랑게.

어 이렇게 안하셔도 되는데요.

김치는 냉장고에 여야지라. 마늘쫑허고 깻잎이사 짠께 암시렁 않을 것이고. 장은 양념허고 같이 노면 되겠구마. 근디 이게 무슨 조은 냄새랑가.

하면서 순천댁은 냄비 뚜껑을 열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앗다메 오 선생이 요리가요 잉. 맛 좋컸는디.

여기서 함께 드시죠.

아녀 해본 소리제. 아침은 진즉에 먹어부렀는디.

나는 그네를 마주보며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리고 예전부터의 버릇이지만 분위기를 바꾸노라고 우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잠깐의 침묵이 어색했는지 순천댁은 얼른 일어섰다.

아이고오 내 정신 좀 보소. 김치꺼리 절여 놓고 내동 파죽 맹글라고 잊어불고 있었네. 나는 갈라오.

저어, 사모님 잠깐만요.

순천댁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다렸다.

<글: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