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이요, 정식정부가 아닌 임시정부였다. 우리 민족사에서 민주공화정부로 수립된 첫 정부요, 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임시로 수립된 것이다. 이 말은 다음 목표를 ‘정식’ 대한민국 수립이라 밝힌 것이다.
임시정부는 수립 자체에서 민족사적 정통성을 가진다. 3·1운동에서 표출된 민족의 열망인 민족국가, 국민주권국가 수립 욕구를 임시정부가 달성했다. 당시 선언으로 나타난 여러 정부 가운데 실체를 가진 노령 대한국민의회,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 한성정부를 하나로 통합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 시기(1919∼32), 이동시기(1932∼38), 충칭(重慶)시기(1939∼45)를 거치면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국내 행정력 장악 노력, 직할 군사조직과 만저우(滿洲) 독립군 통할 노력, 외교활동, 의열투쟁, 군사력 양성과 광복군 창설, 연합군과의 연대와 국내진입 시도, 좌우합작과 국내외 독립운동의 통합 등이 그 골간이었다.
시기에 따라서는 매우 허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부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안으로는 독립운동계의 분화와 갈등으로, 밖으로는 중국 내정을 비롯한 국제 정세의 변화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심각한 국면에 이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임시정부는 이런 난관을 극복해 나가면서 무려 26년 반 동안 유지됐다.
한국사와 세계사에서 임시정부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 대내적으로는 최초의 민주공화정부를 세웠고 이념적 분화를 극복해 좌우통합정부를 달성하였다는 두 가지 사실에서 민족사적 의미를 갖는다. 특히 독립운동의 대통합 달성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세계 식민지해방운동사에서 정부조직으로 26년이 넘는 기간 식민지해방운동을 전개한 전무후무한 사례를 남겼다. 이로 인해 열강 세력이 카이로 선언(43년 12월1일)을 통해 독립을 보장한 초유의 기록을 남긴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임시정부는 해방 후 오히려 풍랑을 겪었다. 해방 정국에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임시정부 세력은 설 곳을 잃었고 남북한 집권세력에 의해 역사의 무대에서 철저하게 배제됐다. 그 이후에도 ‘정당성’ 문제가 있어 보임직한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그 정권은 ‘정당성’ 확보를 위해 ‘정통성을 가진 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그 반대로 이에 저항하던 세력들은 임시정부를 형편없는 존재로 평가절하했다.
임시정부가 수립 자체에서 정통성을 확보했다고 이미 밝혔다. 그렇다고 해서 임시정부가 끝까지 그것을 독점하지는 못한다. 정통성이란 민족의 양심과 일치하는 데 있고 민족의 양심이란 일제의 강점에 저항하고 민족 독립을 추구하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이 노선 위에 서 있었다면 모두가 활동 내용만큼 정통성을 가지며 그 활동이 펼쳐진 지역이나 인물의 이념에 절대적으로 구속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전 구도 속에서 남북한 모두 정권 유지를 위해 정통성 법통성 놀음을 펼쳤다. 여기에 일부 학계 인사들도 견강부회했다. 남한이나 북한 어느 한 쪽에 배타적인 정통성을 부여하면 통일 이후 어느 한 쪽에만 정통성을 두겠다는 논리가 되기도 한다. 우리 민족사를 더욱 왜소하게 만드는 일인데도 말이다.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이하여 국가보훈처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령집’을 발간했고 관련 학계가 60개 주제로 된 방대한 기념논문집을 준비하고 있다. 비로소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제 길에 들어서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김희곤(안동대교수·한국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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