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未完의 4·19 그리고 DJ

  • 입력 1999년 4월 13일 19시 31분


지난 7일이 30주기였던 고(故)신동엽(申東曄)시인은 39년전인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미치고 싶었다/4월이 오면/곰나루서 피터진 동학(東學)의 함성/광화문서 목터진 4월의 승리(…)

그러나 혁명이 시인의 환호나 민중의 정열만으로 완성될 수는 없는 것. 혁명의 주도세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혁명의 과실인 권력은 부패한 자유당에서 ‘준비 안된’ 민주당으로 넘어갔고, 신구파간 정쟁(政爭)에 취약하기 짝이 없었던 장면(張勉)정권은 이듬해 5월16일 새벽 한강을 넘어온 박정희(朴正熙)소장의 쿠데타군에 맥없이 무너졌다. 4·19혁명의 좌절이었다. 그로부터 30년간 4·19는 질식하고 매몰됐다.

▼畵龍點睛의 낙점은?▼

4·19를 부정한 박정희 개발독재는 국가의 총량적 부(富)를 짧은 기간에 확대, 축적하는 눈부신 고도성장을 이뤄냈으나 그 ‘신화(神話)’의 이면에는 심각한 인권 유린과 노동자 농민의 희생, 정경유착에 따른 불평등 성장 등 비(非)민주·반(反)민주적 억압구조가 도사리고 있었다. 특히 정치권력이 키워주고, 관료가 컨트롤하고, 재벌이 뒷돈을 대는 수직적 네트워크의 ‘박정희 모델’은 전두환·노태우(全斗煥―盧泰愚)정권에 이르러서는 최고 권력자가 수천억원대의 비자금을 챙기는 약탈―공물(貢物)의 구조로까지 변질됐다. 이미‘박정희 모델’은 더 이상의 효용성은커녕 마땅히 개혁되어야 할 낡은 시스템이었을 뿐이다.4·19혁명의 정신은 79년 부마(釜馬)사태,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87년 6월항쟁 등 30년 군부정권하에서도 끈질기게 그 생명력을 이어왔으나 이런 시스템하에서는 혁명의 진정한 완성을 이뤄낼 수 없었다. 따라서 3당 합당으로 권력을 잡은 YS(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는 이 낡은 시스템을 깨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3당 합당이란 태생적 한계에다 개혁의 철학과 비전이 빈곤했던 그의 ‘문민정부’는 소리만 요란한 빈수레 격이었다. 끝내 YS 문민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란 국가 위기를 불러들인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4·19혁명은 여전히 미완(未完)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그 역사적 책무는 DJ(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로 넘겨졌다.과연 DJ는 미완인 4·19에 화룡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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