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91)

  • 입력 1999년 4월 15일 19시 46분


우리는 제일 안쪽의 후미진 등나무 덩굴 아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동우가 가방 안에서 우유와 빵을 하나씩 꺼내어 내게 내밀면서 웃었다.

우선 이것부터 먹어라.

어떻게 된거야. 나는 니가 담치기 해가지구 골목에서 달려간 줄 알았다.

말 마라. 그 집으로 넘어 들어갔는데 밖을 보니까 골목에 벌써 진을 치구 있지뭐야. 다시 옆집 담을 넘어서 들어가니까 좁아 터진 마당에 숨을 데가 있어야지. 바루 문 옆에 뚜껑까지 덮인 플라스틱 통이 있더라. 열어보니까 다행히 연탄재 두어 개 뿐이야. 그래서 그 속에 들어가서 뚜껑 닫구 쪼그리고 있었지. 아, 쥐가 나고 발 저리고 차라리 나가서 자수할뻔 했어.

문건은 가지구 나왔지만 책이며 살림들은 모두 거덜이 나버렸다.

하는 수 없지 뭐. 어쨌든 그 방 안에 우리 흔적이 남았을텐데 이제부터 조여오기 시작할 거다.

나는 얼른 가슴께를 더듬어 보고 나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수첩 뚜껑 안쪽에 끼워져 있던 주민증을 빼내어 점퍼의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우선 수첩부터 소각해야겠어. 전화번호며 메모가 있잖아.

주요 번호만 외워 두기로 하자. 필요하면 그때 그때 물어서 처리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직접 누구에게 연락할 처지가 아니야.

나는 동우에게 물었다.

너 주민등록증은 가지구 있겠지?

내게 아냐. 인천 쪽에서 만들어 왔어. 사진과 직인 처리를 잘 하는 노동자 형제가 있어서 말이지.

안전했어?

물론이지. 지방에서 여러차례 검문을 당해봤는데 별 일 없었어.

우리는 각자의 수첩을 꺼내어 한 장씩 뜯고 비닐 커버까지 분해해서 벤치 아래 모아 놓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종이는 잘도 타올랐다. 연기가 좀 피어 올랐지만 평일 이른 아침의 성당 뒤뜰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비닐이 고약한 냄새를 피우면서 녹아내리자 검은 재 한 줌만 남았다. 동우가 내 가방을 툭 건드리면서 물었다.

문건은 어떻게 할까? 없애버릴 수도 없구.

이게 바루 조직이다. 사수해야 돼. 건이네 공장에 보관하면 어떨까?

동우는 잠깐 생각했다.

가만있어 봐. 하긴 저들이 우릴 파악하구 덮친 건 아니었어. 후리가리에 우리가 우연히 걸려든 거지.

하지만 이제부턴 달라. 전담 부서가 달라질 거야. 그치들은 우리가 수배자였다는 걸 대번에 알았을 거야. 책들이 있었잖아. 책의 어딘가에는 우리 이름이 적혀 있을지두 몰라.

적어두 우리 이름 정도는 파악을 하게 되겠지. 인상착의도 물론이고….

당분간 행동을 자제해야겠어. 건이를 불러내어 상의를 해보자.

하면서 나는 덧붙였다.

될 수 있는대로 광주서 올라온 친구들 선과 떠불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

동우와 나는 성당에서 나오자마자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로 건이를 찾았다. 건이는 당장에 동대문 시장 근방으로 나왔다. 우리는 시장 안에 있는 철야 다방에 들어가 구석 자리에 모여 앉았다. 지방 상인이나 트럭 운전기사 몇 사람이 의자에 늘어져서 잠들어 있었다. 건이가 앉자마자 우리에게 핀잔을 주었다.

<글 :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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