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민우회의 성희롱 상담창구에는 최근 성희롱 예방지침 마련을 계기로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직장 상사가 출장 길에 포르노 테이프를 샀다. 회사에 돌아와서는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더니 나를 불러놓고 커튼을 쳤다. 그리고 포르노 비디오를 켜더니 가까이 와서 보라고 말했다. 사장한테 보고할까 고민도 해봤으나 이 사람한테 도리어 당할까 두렵다.”
여성민우회 성희롱 상담창구에는 이처럼 명백한 성희롱에 대한 제보가 잇따르고 있으나 대부분 인사상 불이익이나 사회적 불명예를 두려워해 소송을 낼 엄두도 내지 못한다.
최근 대구시립합창단에서 벌어진 사건은 성희롱을 보는 한국 사회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희롱을 일삼은 합창단 지휘자에 대해 단원들이 처벌을 요구하자 합창단을 운영하는 대구시가 ‘불화’를 이유로 합창단을 아예 해체해 버렸다.
성희롱 삐삐를 쳐대는 사장이나 시정요구를 묵살하고 합창단을 해체한 대구시 공무원들이나 성희롱 소송의 새로운 물결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들이다.
미국에서는 성희롱 사건이 대통령까지 옭아맸다. 남직원들의 성희롱을 방치한 일본계 기업은 여직원들에게 거액의 합의금을 물어줬다.
작년 미국은 성추문으로 시작해 성추문으로 끝난 한해였다. 아칸소주 주공무원이었던 폴라 존스가 제기한 성희롱 소송과 관련해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탄핵재판을 받았다. 존스는 클린턴대통령이 아칸소주 주지사 시절인 91년 5월 자신을 호텔방으로 불러 승진을 미끼로 오럴섹스를 요구했다며 94년 5월 2백만달러의 보상금과 함께 사과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이 성희롱 소송 사건은 작년 4월 “일반적 성희롱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기각됐으나 존스가 ‘다시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올해 클린턴대통령으로부터 80만달러 합의금을 받고 종결됐다.
일본 미쓰비시(三菱)자동차는 작년 6월 일리노이주 노멀공장의 여직원 7백명이 제기한 성희롱 소송에서 3천4백만달러의 합의금을 지불했다. 성희롱 소송 사상 가장 큰 액수의 합의금이었다. 이 사건은 성희롱을 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사업주의 책임을 물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남성우위의 문화 속에서 ‘직장의 꽃’을 적당히 즐긴 한국 남성들은 이제 동료 여직원을 대하는 시선 언어 몸짓을 근본적으로 교정해야 할 시기를 맞고 있다. 자칫 농담처럼 여기고 던진말 몇마디로 패가망신하고 멀쩡한 회사까지 결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올해 2월 한국에서도 새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른 성희롱 예방지침이 마련돼 성희롱 가해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지 않는 사업주에게는 최고 3백만원의 과태료를, 피해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줄 때는 5백만원의 벌금을 물릴 수 있다. 과태료와 벌금은 민사상 손해배상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태평양 법무법인 이정한(李柾翰) 변호사는 “개정 남녀고용평등법이 사업주에 대해 성희롱 방지와 관련한 의무규정을 두고 있는 만큼 이를 근거로 앞으로 성희롱 피해자가 직접 사업주를 상대로 민사상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성희롱 피해자들이 소송을 내기를 주저한다. 서울대 우모조교가 한 교수를 상대로 낸 성희롱 사건이 유일한 판례이다. 대법원은 97년 판결문에서 “남녀관계에서 상대방에 대한 성적 관심을 표현하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이 상대방의 인격권을 침해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것은 위법”이라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사업주에 해당하는 정부와 서울대총장에 대한 위자료 청구는 “업무 관련성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미국의 성희롱 소송 근거법은 64년 제정된 시민법이다. 인종 성차별 등 모든 종류의 차별을 규제하는 시민법에 의해 설립된 고용평등위원회에서 성희롱 소송을 주로 대행한다. 정부가 피해자를 대신해 소를 제기하고 법원은 성희롱 가해자나 사업주에게 징벌적 배상금을 부과함으로써 성희롱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 미국에서도 처음부터 성희롱 소송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91년 클라린스 토머스 대법관 임용 청문회에서 그의 비서였던 아니타 힐이 성희롱 행위를 폭로함으로써 성희롱을 관행적으로 묵인하던 미국 여성들이 용기를 얻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대법원에서만 3건의 성희롱 소송이 계류돼 있다.
여성민우회 최명숙(崔明淑)사무국장은 “여성 피해자의 문제 제기를 용인하는 성숙된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한다”며 “성희롱을 당한 당사자를 죄인 취급하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좋은 법률도 장식품에 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성희기자〉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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