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말은 몰라도 정치인에게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모욕적인 말이다. 정치 선진국이라는 영국의 경우 의회에서 절대 써서는 안되는 말이 바로 동료의원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만약 이 말을 썼을 때 바로 취소 사과를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엄한 제재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 정치인들은 적당히 거짓말을 할 줄 알아야 하고 해도 상관없다는, 거짓말 불감증에 걸려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선거 때 표가 된다싶으면 되지도 않을 얘기를 그럴듯한 공약으로 포장해 내놓기가 일쑤다. 당선만 되면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식이다.
DJ를 거짓말쟁이라고 한 YS도 92년 대선운동 때 ‘대통령직을 걸고라도’ 쌀시장을 절대로 개방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쳤으나 당선된지 1년도 안돼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한국정치사를 왜곡시킨 5·16군사쿠데타 세력은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것’을 공약했으나 번의에 번의를 거듭한 끝에 약속을 뭉개버렸다.
38년전 바로 그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김종필(金鍾泌·JP)자민련총재와 국민회의 김대중총재가 97년 대선 직전 서명한 내각제 합의문은 ‘늦어도 99년 12월말까지 개헌을 완료한다’고 되어 있다. 이 내각제개헌 약속은 YS가 90년 3당합당 때 한 내각제 밀약(密約)과는 달리 국민에게 공개적으로 한 말이다. 1金(YS)이 내각제 합의문서를 휴지조각으로 만든데 이어 이번에는 2金(DJ, JP)도 그 공약을 결국 어기는게 아닌가 하는 관측이 일반화되고 있는 가운데 국민은 9월을 기다려보게 됐다. 김대통령은 3월19일 기자간담회에서는 내각제문제에 대해 “2, 3개월 뒤에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뒤 불과 20일밖에 지나지않은 이달 9일 김대통령은 “오는 8월말까지는 내각제 논의를 하지 않기로 JP와 합의했다”고 밝혔다. 20일 전에 한 얘기보다 그 시기가 두달 이상 늦춰진 것이다.
아무튼 여당의원들에게 내각제 얘기를 꺼내지 말도록 재갈을 물린 시한이 왜 8월말이냐를 놓고 시중에 그럴듯한 루머들이 나돌고 있다. 이를테면 8월중에 남북관계에 모종의 빅이벤트가 있을 것이고, 그러면 내각제는 자연스레 흘러가 버릴 것이 아니냐는 얘기들이다. 남북문제를 국내정치에 이용할 리가 없을 테니까 그야말로 루머에 불과한 말이겠지만 꽤 설득력있는 가설들이 곁들여져 번지고 있다.
내각제개헌은 9월부터 논의를 시작해 연내에 끝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자민련 일부를 제외한 정치권의 ‘상식’이다. 9월10일부터는 정기국회가 열리고 국정감사준비도 해야 한다. 따라서 정말 ‘연내 개헌’약속을 지킬 생각이라면 비교적 여유있는 여름은 그냥 보내고 바빠지는 9월부터 시작할게 뭐냐는 의문도 당연히 따른다. 공동여당간에 완전합의를 이뤄내느냐도 문제지만 야당인 한나라당과의 합의를 단시일내에 이끌어 낼 수 있을지가 더 큰 의문이다. 한나라당이 반대하면 개헌은 불가능하다.
87년 직선제 개헌때는 4개월만에 끝냈지만 당시는 노태우(盧泰愚)민정당대표가 6·29선언을 한 후여서 1盧3金이 쉽게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다르다. 더구나 정치관련 법률하나 만들어 통과시키는 데도 수개월에서 1, 2년까지 걸리는 현실에서 권력구조의 근간을 바꾸는 개헌안이 4개월만에 확정되리라고 믿는 것은 아무래도 순진하다. 이래저래 두분(DJP)간에 밀약이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만약 연내 개헌공약을 어기게 될 경우 DJP는 그 이유를 뭐라고 둘러댈까. 흔히 쓰이는 ‘상황변경론’을 동원할까. 그렇다면 무슨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다고 할까. 이와 관련, 김대통령이 엊그제 부산MBC와의 회견에서 내각제문제는 양당의 약속 외에 ‘국민여론’ ‘국가적 필요성’을 감안해 최종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는 기사는 시선을 멈추게 한다.
정치인이 말을 바꾸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 대체로 권력을 더 오래, 더 강하게 잡겠다는 욕심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정치사(史)가 입증하는 ‘비극’이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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