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안경환/고위공직자와 도둑

  • 입력 1999년 4월 19일 19시 19분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도둑은 제 입으로 훔쳤다고 하는데 잃은 사람은 없다니 말이다. 그렇게 주인 없는 돈이라면 나라도 한번 나서볼까 보다. 그 돈이면 북한 어린이 수천 명을 살릴 수 있을 텐데. 이런 허망한 생각에 우울한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란다. 본래의 속성이 그렇단다. 부패와 성(性)은 당한 쪽에서 쉬쉬하는 것이. 그래서 중세부터 전해오는 서양도둑의 행동강령 중의 하나가 고관의 돈과 수녀의 정조를 노리라는 것이다. 현장에서 잡히지 않으면 뒤끝이 없다는 것이다.

▼무너지는 공직자倫理 ▼

어느 나라에서나 공직은 성과 더불어 순수의 상징이었다. 한 사회를 도덕적으로 지탱하는 두 개의 버팀목이 공직윤리와 성윤리였다.

그 중 하나가 이제 기능을 상실했다. 성윤리는 공직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생활의 몫으로 물러앉았다. 한국의 A양이든, 미국의 대통령이든 문란한 성을 이유로 공적인 일을 못하게 할 수 없다. 성윤리가 변질된 만큼 사람들은 더욱더 공직윤리에 집착하게 된다. 마지막 남은 사회의 기둥이기 때문이다.

고위 공직자의 거액 도난사건이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다. 새 정부의 실세 경제스타로 알려진 도지사가 피해자이고 두 경찰서장도 고액의 재물을 도둑맞았다고 한다.

유지사의 경우 도둑은 미국 돈 12만달러를 훔쳤다는 데 본인은 1달러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은행에 돈을 맡기면 여러가지로 안전하고 편리한데 왜 이들은 꽤 많은 돈을 관사에 놓아두거나 김치냉장고 또는 화병에 숨겨두는 불편을 감수했는지 궁금하다. 당사자들의 변소대로 정재(淨財)였다면 감사원이나 수사기관의 계좌추적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야당은 길길이 날뛰고 있다. 새 정부 들어서고 사사건건 그렇게나 괴롭히던 야당이 친절하게도 잃은 돈을 찾아주겠다고 나서다니, 이제야 여야공조가 제대로 되려나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정치라니 말이다.

인권 탄압자로 국내외 인권단체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사람이 시민단체의 거센 항의 시위에도 아랑곳않고 국제인권대회에 참석하러 의기양양하게 공항을 나서는 모습만큼이나 어색하다. 혹시 그 자리에서 중대한 양심선언이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진실 철저히 규명해야 ▼

청와대는 ‘엄정 수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너무나 귀에 익은 말이다. 그래서 결말도 쉽게 예측이 된다. 이 말이 나오면 반드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지 않았는가. 야당의 ‘결사투쟁’ 끝에는 반드시 ‘정치적 해결’로 결말지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자랑스러운 여의도의 전통이 아니었겠나….

‘국민의 정부’가 어떤 정부인가. 얼마나 긴 세월을 기다리며,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며 이룩한 민주적인 정권교체였는가.

독재와 분열, 부패와 무능을 뒤로 하고 민주와 화합, 정직과 효율의 새 시대를 열라고 국민이 건설한 정부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국민의 정부에서도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면 국민은 어쩌란 말인가.

설마하니 이번에는 다르겠지. 1년몇개월을 속았으니 한 번만 더 속는 셈치고 기다려 볼 것이다.

만약 이번에도 마찬가지라면 언젠가 말썽이 된 자니 윤의 개그나 되씹으면서 울분을 삭여야겠다.

미국고관과 한국고관의 차이가 무엇인고 하니, 미국의 고관은 뇌물을 받으면 감옥에 가는데, 한국의 고관은 미국에 간다는 것이다. 그때는 조국에 대한 모독이라고 펄펄 뛰는 분이 많았는데 기막힌 예견이 아닌가.

지난 정부 말에 큰 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몇몇 전직고관이 미국 땅에 잠적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일급 코미디언은 한국정치라는 저질 코미디의 본질을 쉽게 꿰뚫고 있었나보다.

안경환<서울대교수·법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