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파이어니어]여성민우회 사무처장 윤정숙씨

  • 입력 1999년 4월 20일 19시 29분


3월초 유엔여성지위위원회에서 한국은 여성정책 모범국가로 선정됐다. 여성관련법의 발전이 두드러진다는 평가도 받았다.

사실 지난 10여년간 남녀고용평등법 성폭력특별법 여성발전기본법 가정폭력방지법 등 굵직굵직한 법들이 만들어졌고 7월부터는 혁신적인 남녀차별금지법까지 시행된다. ‘여성없는 여성운동’이란 지적이 있지만 여성운동단체의 역할이 컸다. 대표적 단체가 한국여성민우회. 그리고 이 단체의 창립회원인 윤정숙(尹貞淑·41)사무처장.

“이제 실질적인 평등을 이루는 문제가 남았어요. 21세기에는 이들 법과 제도가 뿌리내려 한 성(性)이 한 성(性)에 대해 차별하지 않는 사회정의가 서도록 노력겠습니다.”

★ 다시 세상속으로 ★

“일하고 싶어요.” 나이 서른을 바라보던 87년 봄 여성단체연합이 세들어 있던 서울 중구 정동 옛 구세군별관으로 이 단체의 이미경(李美卿·현 국회의원)부회장을 찾아갔다. ‘나’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화여대 신입생시절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밤새 울었다. 다음날부터 동아리방과 빈민지역 탁아방이 ‘강의실’이 됐다. ‘새로운 세상’이 거기 있었다. ‘하루 1㎝씩 크는 것 같았다’.

그리고 4년후 졸업장은 받지 못한 채 ‘존경하는 운동권 선배’와 결혼. 아들을 키우며 남편이 노동운동을 잘 하도록 내조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은 일에 너무 바빴고 ‘욕구’를 죽여야하는 가난 속에 쓸쓸함을 느꼈다.

★ 여성운동 10년 ★

두어달 KBS시청료납부거부운동 여성연합 간사로 일하다 막 출범한 여성민우회 사무직 여성부 책임을 맡았다. 밤새워 교재를 3∼4개나 읽어갔다. ‘진짜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여성노동자들에게 ‘법을 도구로 어떻게 직장에서 권리를 찾을 것인가’ 교육과 상담. 일주일에 4번 지방교육을 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지방에서 저녁강의 후 새벽기차로 서울로 돌아왔다가 다시 인천 집에 가 아침밥을 해 놓고 출근하는 날이 많았다. 여성이 변해가는 것을 보며 피곤한 줄 몰랐다.

“사회 곳곳에 남녀차별의식이 너무 강했어요. 그러나 소극적인 여성노동자가 노조간부가 되고 평범한 주부가 민우회 회원이 되는 것을 보고 ‘변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임금차별에 대한 법정투쟁이나 결혼퇴직제 반대운동은 몇년을 끌었다. 94년 서울대조교 성희롱 사건 때 ‘투쟁’을 주도한 여성민우회의 사무국장으로 여성계의 힘을 모으는 데 힘썼다.

배상을 받지는 못했으나 잠복해 있는 문제를 사회적으로 부각시킨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믿는다. 문제제기를 통해서만 의식과 제도를 바꿀 수 있기 때문.

★ 세계 여성계 흐름 동참 ★

유학 후 월 90만원을 받는 사무처장으로 돌아왔을 때 주위에서는 놀랐다. 함께 공부한 각국 친구들은 세계은행이나 유럽연합에 들어갔다. 그는 여기서 앞으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구슬을 꿰는 여자’. 상근자 35명과 회원 5천명의 아이디어를 모아 사업을 벌여나간다. 국제회의에도 자주 참가하는 편.

요즘에는 20세기안에 우리 사회에서 없애야 할 성차별 사례를 모아 없애버릴 ‘음모’를 꾸미고 있다. ‘나 여기 캠페인(나의 여성차별체험 드러내기 캠페인)’. ‘나 여기 수첩’에 여성 각자가 경험한 차별내용을 기록하면 남녀차별금지법이 발효되는 7월1일 수첩들을 모아 땅속에 영원히 묻어버릴 계획. “차별사례는 무궁무진합니다. 누가 없앨까요. 느낀 사람, 아는 사람이 먼저 나서야 합니다. ‘잘못’이라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해야 합니다.”

새 천년의 계획이 궁금했다. “한국여성운동은 역사는 짧지만 민주화 경험과 역동성을 갖췄습니다. ‘여성의 주류화’란 세계 여성계의 흐름에 맞춰 그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국내 문제를 세계적 관심사로 만드는 작업도 필요하고요….”

〈김진경기자〉kjk9@donga.com

◇윤정숙씨 약력

△58년 인천 출생, 여고시절까지 현모양처가 꿈이었다.

△76년 이화여대 사회학과 입학, 84년 졸업

△87년∼ 한국여성민우회 사무직여성부장 사무국장 사무처장

△97년 영국 서섹스대학 여성학 석사

△E메일〓webmaster@womenlink.or.kr

△존경하는 여성운동가―이효재(李效再)전 이화여대교수(별명이 ‘감격시대’일 만큼 작은 일에 감동하는 순수함과 믿는 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좋다)

△나의 한마디―“작은 일에 분노하곤 하지만 내 인생에 대한 고뇌는 지구의 무게 만큼이나 무겁다”(부부싸움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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