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96)

  • 입력 1999년 4월 21일 19시 24분


수저를 들고 한참이나 정신없이 식사를 하던 임 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헌데 너 잠자린 있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있을턱이 없지.

공장에서 일 다 끝나구 깨끗이 치워 놓구 자면 안돼요?

그건 안된다. 화재 염려두 있구 다른 애들 눈치두 있구 하니까. 가만있어 봐… 근데 너 임마, 달랑 그 차림으루 짐두 없이 나왔단 말야?

예, 오늘 새벽에요.

임 사장은 어이가 없는지 밥을 입에 가득 문채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새끼 참, 속 썩이네. 안되겠어, 너 말야 내가 느이 사수를 붙여줄테니까 거기 딱 붙어서 떨어지지말구 먹구 살아라.

점심을 마치고 공장 마당쪽으로 나오더니 임 사장이 잠바 주머니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뒤져 내밀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요 아래 안양극장 가면 무협영화 동시상영 중이다. 그거 때리고 이따가 일곱 시까지 일루 와. 애물단지 하나 왔네!

나는 멋적게 웃어 보이고는 다시 비포장도로를 걸어서 번화가 쪽으로 나왔다.

극장 안에는 젊은 남자라고는 보이지도 않았고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오전 수업을 끝내고 왔을 듯한 꼬마 두어 명 뿐이었다. 나는 중간쯤에 널찍하게 통로가 있는 좌석에 두 다리를 주욱 뻗고 앉아서 영화를 보다가 자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잠은 왜 그렇게 쏟아지는지.

영화 두 편을 그야말로 연속으로 때렸는데도 시간은 다섯 시가 조금 못되었다. 영화관을 나와서 재래시장으로 간다. 시장에서 속옷가지와 양말 세면도구 등속을 사고 그것들을 담을 비닐 보스턴백을 하나 산다. 갈아 입을 바지 한 벌과 안에 입을 셔츠를 하나 사고. 그리고 너무 지저분하면 남의 눈에 띄니까 목욕을 하기로 한다. 목욕탕에 가 보아도 탕 안은 아직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나 혼자 독탕이다. 일회용 플라스틱 면도기로 그동안 자랐던 수염을 깨끗하게 밀어낸다. 속옷을 갈아 입고 양말까지 갈아 신고나니 집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일 부터는 일당으로 살아가기로 굳게 결심하고는 오늘 마지막으로 식당에 들어가 얼큰한 육개장으로 저녁을 때웠다.

오 군아 인사해라. 우리 공장서 젤루 잘 나가는 미스터 박이다.

임 사장이 톱밥 투성이의 키가 멀쑥한 젊은이를 내게 소개했다. 그는 읍내 극장에서 만난 사이처럼 흔쾌하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사장님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슴다. 같이 고생해 봅시다.

그래 오 군 가기전에 너 잠깐 나 좀 보자.

그는 기계가 멈춘 공장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너 말야 저 친구한테 내 시골 동생 친구라구 말해 놨다. 그렇게 알구 있어. 저 친구 명랑하구 성격 좋으니까 따라가서 같이 자취해라. 여기선 생활비 줄인다구 다들 그렇게 하지. 방세 식비 반반씩 무는 거야. 나가 봐.

고맙습니다, 선임하사님.

새끼 또 그러네. 사장이래니까.

박을 따라서 나는 안양천변을 따라 걸었다. 바라크들이 즐비한 언덕바지에 이상하게 양계장 건물처럼 길다랗게 지어진 창고 모양의 건물들이 층층으로 연이어 섰는데 나중에 그것이 공단 동네에도 흔한 벌집이라는 걸 알았다. 동네 주위에는 고만고만한 구멍가게들이 여러군데 불을 환히 켜놓고 있어서 내가 떠난 달동네 어귀처럼 작은 시장이 선 것 같았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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