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적으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소송사건이 급증하면서 손해배상액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신시내티 인콰이어러지는 대형 유통회사인 치키타 브랜즈 인터내셔널사에 대한 폭로기사를 발표한지 며칠도 되지 않아 1면에 사과문을 공표하고 1천만달러의 손해배상금을 지불했다.
텍사스의 한 증권회사는 월스트리트 저널을 상대로 2억2천3백만달러의 배심원 평결을 얻어냈다. 뉴욕의 한 주간신문은 2백10만달러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고 문을 닫았다.
지난 10년동안 배심원 평결 손해배상금은 △댈러스 모닝 뉴스지 5천8백만달러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 3천4백만달러 △출판사 하트―행크스 2천9백만달러 △캐피톨 시티즈 1천8백만달러 △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지 1천3백50만달러 △ABS 뉴스 1천만달러를 기록했다.
물론 미국에서 배심원의 평결액이 바로 손해배상액으로 선고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은 이를 합리적인 수준으로 감액하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명예훼손 사건의 평균배상액은 90년초에 비해 96년에는 무려 4배이상 치솟았다.
미국 뿐만이 아니라 독일 일본 등에서도 명예훼손 소송에서의 손해배상액 또는 위자료는 점차 고액화되는 추세다.
미국 여러 주는 명예훼손 소송에서 원고가 승소하면 천문학적인 금액의 징벌적 배상(피고의 악의적 행위에 대한 처벌 성격의 손해배상)도 함께 선고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고 있다.
미국 법원은 원고승소 사건 10건중 6건꼴로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하며 이 액수가 전체 손해배상액의 80% 가량을 차지한다.
증가하는 명예훼손 소송과 손해배상금으로 미국 언론계 전체가 골머리를 앓는다. 특히 유명 연예인 등의 사생활 폭로기사로 판매부수를 늘리는 황색언론이 서리를 맞았다.
미국 언론단체들은 막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때문에 문을 닫는 언론사가 속출하자 명예훼손법을 개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인권의식 고양으로 명예훼손을 한 언론사를 상대로 제기하는 손해배상소송이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학계 등에서 미국의 군소언론사에 ‘저승사자’처럼 통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최근 언론소송에서 법원이 인정하는 위자료의 액수는 급격한 증가세를 보인다.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명예훼손 내지 초상권 침해에 대해서도 3천만원대의 위자료가 일반화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손해배상금이 억대를 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오양호(吳亮鎬)변호사는 “한국 언론사도 미국 언론사처럼 명예훼손 보험에 가입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심지어 검사들이 언론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까지 생겼다. 소장법관들도 대전법조비리 보도와 관련해 일부 언론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할 것을 한때 검토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법체계상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도입이 어렵다면 위자료의 고액화 등으로 언론의 침해성 보도를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같은 시류를 타고 권력자 또는 권력기관이 불편한 보도를 막기 위한 위협용으로 소송을 내는 사례도 있다.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의 아들은 최근 아버지 덕에 사업에 성공했다고 보도한 신문을 상대로 3천9백50만달러를 지급하라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한겨레신문은 문민정부 시절부터 김현철(金賢哲)씨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김현철씨가 한겨레신문을 상대로 낸 명예훼손 소송에서 1심법원은 4억원의 손해배상을 지급하도록 판결했다.
이 판결이 나온 후 법조계에서는 공인(公人)인 현직대통령의 아들에 대한 보도를 지나치게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는 시각도 있었다. 김씨는 2심 계류중 소취하를 했다.
서울대 추광영(秋光永)교수는 “언론사가 공인이나 공적기관에 대해 악의적이거나 고의적인 비방이 아닌 보도를 한 경우 입증책임을 원고쪽이 지게 하는 등 언론보도의 면책범위나 재량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64년 명예훼손 소송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판결을 내렸다. 뉴욕타임스 사건에서 공직자에 대한 비판에 관해 종래의 엄격책임론을 버리고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라는 새로운 책임론을 정립했다.
‘현실적 악의’라는 개념은 공인이나 공공의 이익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언론보도의 책임을 완화해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즉 문제된 표현이 거짓임을 알거나 약간의 주의만 기울이면 거짓임을 알 수 있는 데도 이를 무시하고 보도했을 때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다.
한국 대법원은 97년 김해군 공무원이 국제신문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피고인 국제신문의 ‘현실적 악의’가 없으니 면책해 달라는 주장을 채택하지 않았다. 물론 한국 법원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 보도한 것을 전제로 문제된 보도가 진실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는 위법성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사법부는 최근 들어 ‘상당한 이유’의 범위를 점점 좁게 해석해 언론의 책임을 무겁게 인정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언론개혁시민연대 김주언(金周彦)사무총장은 “인권의식의 고양으로 인해 앞으로 명예훼손 소송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언론사들이 언론보도로 인한 인격권 침해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사들이 반드시 사실확인을 거쳐 보도하는 방향으로 취재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영훈기자〉cyhoon@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