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00)

  • 입력 1999년 4월 26일 19시 32분


박과 나는 술집을 나와 언덕을 올라갔다. 비탈 위에 시멘트 블록으로 대충 지은 일 자의 길다란 집들이 층층이 이어져 있었다. 마치 객차처럼 긴 벽에 똑같은 모양의 창들이 뚫려 있었고 아직도 불이 켜진 창문이 제법 많았다. 슬레이트 지붕 위에도 천창이 보였다. 박은 일 자 집의 입구로 먼저 들어서서 내게 턱짓을 하면서 말했다.

들어오쇼. 여기가 대전 발 영시 오십분 열차요.

판자 문을 밀자 먼저 수돗물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바로 문 앞에 공중수도와 수채가 있고 방 하나만한 공간이 비워져서 아낙네들이 빨래나 취사를 하기에 적당해 보였다. 아줌마 한 사람은 요강을 씻고 있고, 다른 아줌마는 들통에서 더운 물을 한 바가지씩 떠서 엎드려 뻗쳐를 하고 있는 웃통 벗은 남자의 등에 끼얹고 있었다. 박이 아는 체를 했다.

육 호 아저씨 들어오셨수? 오늘 좀 빠르네.

엎드려 뻗쳐를 하던 그대로 고개만 돌려서 박을 올려다 본 사내가 대꾸했다.

몸이 안 좋아서 오늘 일찍 들어왔어.

글쎄 일당두 좋지만 사흘이나 잠을 못잤지 뭐예요.

곁에 섰던 그의 아내가 하소연 하듯이 말했다. 집의 가운데로 사람 하나 비켜 지날만한 좁은 복도가 집의 끝까지 이어졌다. 복도의 양쪽에 역시 똑같은 모양의 미닫이 문이 보이고 정말 벌집 같은 방들이 붙어 있었다. 복도에는 거의 기한이 다 되어 보이는 전구의 알이 거뭇거뭇한 두 개 짜리 형광등 하나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 방 앞에는 신통하게 신발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박이 복도의 안쪽에 있는 방의 미닫이를 열고 손을 안으로 더듬어 형광등을 켰다. 미닫이 위쪽에는 16이라고 씌어진 나무 조각이 붙어 있다. 그는 구두를 벗어서 들고 방 문턱을 넘어 들어갔다. 그는 신발을 미닫이 위쪽에 있는 판자의 선반 위에 놓아 두었다. 퀴퀴한 발고랑내와 쉰 김치 같은 느낌의 냄새가 방 안에 가득 고여 있다. 바로 발 밑에 연탄 아궁이가 있는 듯 연탄가스 냄새도 풍겨 온다. 나도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 방에선가 남녀가 다투는 소리도 들리고 늙은이의 기침 소리와 어린 아기의 턱에 걸린 울음 소리도 들려왔다. 그는 때에 절은 이불과 담요 등속을 발로 걷어 올리고 내가 앉을만한 공간을 내주었다.

거기 편히 앉으슈. 자아 우린 이렇게 산다우.

박이 익살스럽게 말했다. 거울이 하나, 반찬이나 식기와 함께 세면도구를 얹어 놓은 비닐 벽걸이가 벽에 붙어 있고, 미닫이 옆의 구석에 푸른 색 요강이 보였다. 비닐 천을 씌운 미니 옷 장이 서 있고 방 한 가운데 허공에는 빨랫줄이 가로 질러 있는데 양말과 속옷 나부랭이들이 걸려 있었다. 그는 담요 한 장을 걷어 내어 문 앞의 공간에 얌전하게 깔았다.

오늘부터 이 자리가 오형 자는 데요. 내일 공장에 나가서 임 사장 한테 담요나 한 장 빌려 달라구 하지.

앉은 자리에서 올려다 보면 천장을 뚫고 창을 낸 곳이 보였다. 벽에 나 있는 창문은 작아서 열어 둔다고 해도 별로 바람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박은 거침없이 옷을 훌훌 벗고 머리맡의 작은 책상 위에 놓인 트랜지스터를 틀었다. 별이 빛나는 밤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심야 음악 방송이 나오는 중이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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