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종수/뿌리깊은 風水맹신

  • 입력 1999년 4월 26일 19시 32분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보노라면 21세기를 앞둔 과학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풍수 망령’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 속에 빠져든다.

얼마 전에는 롯데 신격호 회장 부친의 시신과 이회창 총재 선영 등 출세를 하고 재복이 넘친 후손을 둔 조상들이 차례로 수난을 당했다. 이제는 민족이 우러러 받드는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세종대왕의 묘소에 날이 시퍼렇게 선 수십 개의 식칼과 쇠말뚝을 꽂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 충무공묘소 식칼 섬뜩

이충무공의 무덤에 식칼과 쇠말뚝을 박은 동기가 다름 아닌 한 무속인이 자신의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저지른 것이라고 하는데 왠지 그 이유가 석연치 않다. 굳이 병치료가 목적이라면 세종대왕의 능에까지 쇠말뚝과 식칼을 박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식칼과 쇠말뚝을 이용해 잡귀를 쫓고 부정을 막는 행위는 우리 민속에서 흔한 일이다.

두 분의 묘에다 식칼과 쇠말뚝을 꽂은 행위는 한마디로 비정상적인 사이비 무당의 광란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런 해괴망측한 발상이 가능할까. 유골도둑이나, 묘에 쇠말뚝을 박거나 식칼을 꽂은 일련의 행위는 별개의 사건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은 풍수의 화복(禍福)설을 맹신한데서 일어난 일이다.

사실 풍수 속성상 옳고 그름을 가리기란 쉽지 않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물색할 때 “지리의 학설이 분명하지 못해 사람마다 각기 자기 의견을 내세워 서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어느 것이 참말인지 분별하기 어렵다”고 탄식을 한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세종 때는 한 지관이 경복궁이 명당자리가 아니라는 설을 제기해 조정을 벌집 쑤셔놓은 듯 법석을 떨자 신하들은 물론 세종까지 직접 나서서 시시비비를 가릴 정도였다. 세종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집현전에서 풍수학 강의를 연 최초의 임금이 되었다.

풍수는 과학과 거리가 먼 한갓 미신으로 치부되면서도 한국인들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실로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한 나라의 도읍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마을의 입지, 집터와 부모의 묏자리를 구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은 아직도 뿌리 깊다. ‘전 국토의 묘지화’ 라는 우려할 만한 현상도 실은 풍수와 깊게 연관된 것이다.

세조는 “어차피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육신인데 무덤 안을 석실로 만들어 백성들 고생시키지 말고 봉분도 화려하게 꾸미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왕릉의 공사 인력이 6천명에서 3천명으로 줄었다. 시대를 앞서갔던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호화분묘 사라져야

‘풍수는 미신이다’라며 치지도외(置之度外) 하는 대신에 풍수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먼저 일부 부유층의 호화분묘 조성풍조를 불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직급과 신분에 따라 묘역 크기가 다르게 조성된 동작동 국립묘지의 묘역부터 통일시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장군이나 사병의 무덤 크기를 같게 한 미국의 웰링턴 국립묘지처럼 말이다. 정부 스스로가 생존시 신분과 계급에 따라 묘지의 크기를 달리해 은연중에 매장이 화장보다 좋다고 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호화분묘 억제의 명분과 설득력도 그만큼 약해진다.

풍수를 체계적으로 연구해보면 매우 과학적이고 자연친화적 학문임을 알 수 있다. 자연과의 조화를 무시한 도시계획, 자연과의 공존을 포기한 인간의 이기심을 보면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산이 높으면 건물은 낮게, 산이 낮으면 건물을 높게 지어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려 했던 선조들의 풍수관은 차라리 예술이었다.

어느 도시를 가나 스카이라인을 무시하고 푸른 숲이 아닌 회색 아파트 숲으로 바꿔버린 도시를 보노라면 저절로 얼굴이 붉어진다.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풍수설을 결코 맹신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풍수는 쇠말뚝과 식칼을 남의 무덤에 꽂는 따위의 황당무계한 미신을 조장하는 잡술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전통의 사고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진지한 작업이 필요하다.

정종수<문화재관리국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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