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黨名바꾸기 분장술

  • 입력 1999년 4월 29일 19시 28분


▽‘적과 흑’을 쓴 스탕달처럼 필명을 많이 바꾼 작가도 없을 것이다. 본명이 앙리 베일인 그가 사용한 필명은 무려 1백개가 넘었다. 그는 가문과 아버지의 족적이 이름에 겹쳐져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싫었다. 비평가들은 이런 그의 취향이 ‘출생으로부터의 자유’를 갈구한 데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자신의 이미지가 고착돼 가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국민회의 김영배(金令培)총재권한대행이 최근 당명을 바꿀 수도 있다고 발언해 큰 관심을 끌었다. 우리 정치사에서 정당의 이름 바꾸기는 이미지를 좋게 하려는 분장술에 비유된다. 국민회의도 김대중(金大中·DJ)대통령이 야당총재로서 87년 평민당, 91년 신민당과 민주당에 이어 네번째 지은 당명이다. 모두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총선을 앞두고 새로이 창당하거나 이름을 바꾼 경우다.

▽김영삼(金泳三·YS)전대통령도 당명을 많이 바꾸었다. 그는 79년 신민당, 87년 통일민주당, 90년 민자당, 96년 신한국당의 총재나 대표였다.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도 97년 대선 직전 지금의 것으로 당명을 한번 고쳤다. 정당의 이름이 자동차 모델만큼이나 자주 바뀌니까 공식당명보다는 ‘DJ당, YS당’으로 구분하는 유권자도 많았다.

▽국민회의나 자민련이 당(黨)이라는 명칭을 안 쓴 것은 시민운동 단체와 비슷한 참신성을 노린 전략이다. 지금까지 당명에 많이 써먹은 단어는 민주, 자유, 한국, 공화, 국민, 통일 등이다. 이제 그럴듯한 새 당명을 개발해 내기도 쉽지않을 것 같다. 국민회의의 당명변경 의도는 기존 정당들의 틀을 뛰어넘는 ‘헤쳐 모여’식 정계개편을 겨냥한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명 바꾸기보다 더 시급한 것은 묵은 사당(私黨)의 먼지들을 깨끗이 털어내고 당내 민주화를 이루는 일이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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