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숙씨 이럴땐?]부모가출 농촌아이들 밝게 자라길

  • 입력 1999년 5월 2일 20시 54분


◇편지

요즘 농촌에는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어린이들이 하나 둘씩 늘고 있습니다. 실직때문에 이혼하거나 가출한 부모로 인해 시골 할머니에게 맡겨진 ‘국제통화기금(IMF) 아이들’이랍니다.

이웃에 서리가 하얗게 내린 머리를 수건으로 질끈 동여맨 할머니가 삽니다. 동네 아저씨가 모는 경운기에 몸을 싣는 할머니한테 IMF 손주들은 “할머니 나도 따라 갈거야”라고 칭얼댑니다. 한 푼이라도 벌어 손주들에게 과자 한 봉지, 장날에 바지 하나라도 사주고 싶어 10년전 그만두었던 남의 집 품팔이를 떠나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담벼락에 기대앉아 기다리는 아이들. 할머니는 새참으로 받은 빵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가져와 어린것들의 손에 쥐어줍니다. 한때는 이웃집 친구들과 심심풀이로 10원짜리 화투를 치며 마음껏 자식 자랑하던 할머니는 요즘엔 통 말을 안합니다.

저는 30대 초반의 주부로서 농촌에서 생활한 지 3년이 넘었습니다. 결혼 당시 남편이 집을 얻을 형편이 못돼 농사 지으시는 시부모님 곁에서 함께 살게 되었죠. 2년 후에는 꼭 전세를 얻어 나가살자고 했지만 약속이 깨진 것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농사철이면 새참과 함께 다섯끼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엉덩이를 땅에 붙이지 못합니다. 이웃에는 친구도 없고 변변한 가게도 없기에 적적함도 더해갔지만 지금은 힘든 고비를 넘기고 이 곳의 모든 것이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논둑과 밭둑에는 향기로운 쑥들이 지천이고 비탈진 산아래 쪽으로는 달래가 여기저기 무리지어 있습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없기에 밤하늘의 별은 더욱 빛나고 달빛은 동네 길목을 은은히 비춰줍니다.

누구에게든 힘든 고비가 있기 마련이지만 마음 씀씀이를 달리하면 세상이 달라보입니다. 어려울수록 생각을 가다듬고 마음을 열면 좋은 일이 찾아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농촌에서 한 주부)

◇답장

“농촌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시골에 남겨진 사람들은 노인들 뿐이다”며 이농을 걱정하는 소리를 듣던 것이 얼마전이었는데 이 편지를 읽고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IMF 사태 이후 급격히 확산되는 가족붕괴, 거기서 가장 큰 희생을 당하는 것은 아이들이죠. 별거 이혼 가출 등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그 와중에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혹은시골의할머니할아버지에게로 보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기죽은 아이들, 그 어린 것들을 거둬야 할 할머니의 참담한 심정 등이 눈에 잡히는 듯해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꼭 비관적으로만 바라보지 마세요. 아이가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자연의 품 속에서 맑게 자랄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어서 경제가 회복돼 엄마 아빠가 기쁘게 아이를 데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인생에서 시골에서의 한 시절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게 되기를…. 그러기 위해 어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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