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오부치총리가 지난달 29일부터 5일까지의 미국방문에서는 영어를 쓰지 않았다. 정상회담에서는 물론이고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에서 연설할 때도 모두 일본어로 말했다. 방미기간중 그가 영어를 쓴 것은 시카고 프로야구경기에서 시구한 뒤 관중에게 간단한 인사를 한 것이 유일하다.오부치총리가 일본어를 고집한 것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총리로서의 공식 방미에서 영어를 쓰다가 만의 하나 실수할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움,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말보다 내용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 정치인이나 고위관료 재계인사 학자들은 공개석상에서 통역이 있는데도 굳이 일본어로 말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른바 지일파 인사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상당수는 듣기 거북할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초보 수준이다. 의미전달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저런 정도의 일본어를 할 바에야 차라리 한국어로 말하는 게 나을텐데…”하고 일본기자가 의아해 한 적도 있다. 미국 등 영어권 국가에서도 이런 일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개인적 교제에서는 서투른 외국어도 성의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공개석상, 특히 책임이 따르는 고위인사일수록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해야 한다. 지도층인사가 해외방문중 실력이라도 과시하려는 듯이 설익은 외국어를 구사할 때면 주변 사람은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다.
권순활<도쿄특파원>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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