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일도 벌이지 않고 그냥 나란히 누워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아니면 뜨락에 나아가 벌레들을 들여다 보든가, 산으로 오르는 집 뒤편의 오솔길로 공연히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 보고 싶다. 우리는 한 몸처럼 서로의 부근을 배회하며 가끔씩 눈길을 마주치고 조금씩 다른 몸짓으로 손을 쳐들기도 하고 고개를 돌리고 뺨 위의 가려운 부분을 검지 손가락 끝으로 긁는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사랑하는 것들의 일상은 언제나 새로운 출발이었다. 태어남이라든가 만남이라든가 싫증이라든가 넌더리라든가 이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미움과 노여움과 그리움이나 시시함, 그런 모든 것이 긴 장마철에 한 무리씩 다가오던 끝없는 구름의 행렬처럼 차례로 스쳐 지나왔다. 어릴적에 디즈니 회사의 사막은 살아있다 라는 기록영화에서 보았듯이 꽃봉오리가 움이 트고 꽃잎이 나오고 피어나고 활짝 피어나고 더 활짝 피어나 젖혀지면서 끝에서부터 시들어 움츠러들고 드디어는 차례로 말라 떨어져 가지 끝에 간신히 붙은 꽃잎 하나 흐느적이다가 슬로 모션으로 나부껴 떨어지는 광경. 그리고 필름은 거꾸로 돌아가며 다시 환원 된다. 이 모든 출발들은 매 순간 생생하다.
나는 때때로 세기말의 그림들처럼 불안하다. 이별 또한 새로운 출발이 될테니까. 어쩌면 그는 내게서 자기를 빼앗아 갈지도 몰라.
마야꼽스끼는 책상 속에 넣어 둔 권총을 꺼냈다. 그는 왼 손에 권총을 잡고 약실 속에 들어있던 단 한발의총알로가슴을쏘았다. 그래서 그는 폭풍우같던자신의시대를 시와 함께 차단했다. 그는책상위에 몇 자 긁적거려 두었다.
새벽 한 시가 넘었다. 그대는 잠자리에 들었겠지. 은빛 찬란한 오카 강 같은 은하수가 빛나는 밤이다.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리고 벼락 같이 전화를 걸어 그대를 깨우고 귀찮게 한들 무슨 득이 있으랴. 그들 말대로 사건은 끝났다. 사랑의 배는 나날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 그대와 나, 우리는 피장파장이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준 고통과 슬픔과 상처를 늘어 놓아도 승부의 득실은 없다. 보라, 세상이 정적에 싸여있다. 밤 하늘은 별빛의 예물로 뒤덮였다. 이런 시각에 그대는 일어나 시대와 역사와 그리고 우주와 이야기해야 한다.
서양식 혁명은 왜 그럴까. 붉은 기의 저 넘어로 퇴폐적인 저녁 노을이 걸려 있다. 죽음은 장렬하고 비극적이지만 어쩐지 각혈처럼 병적이다. 카프 시절을 보낸 어느 시인의 전투적이고 살벌한 빨치산의 노래처럼.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나의 주검을 슬퍼 말어라 깃발을 덮어다오 혁명의 기를 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모든 아방가르드는 발 빠른 자의 것이리라.
어려서 시골 살 때 등교 길에서 산 모퉁이를 돌아서 마주 오는 상여를 많이 보았다. 상여 위에는 두건을 쓴 노인이 앞에 타고 서서 요령을 흔들며 선소리를 하고 목도를 멘 상두꾼들이 뒷소리를 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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