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16)

  • 입력 1999년 5월 14일 19시 08분


보세요 나는 학필이가 아니라 아직 병아리지만 선생이라구요.

우리는 방 바닥에 도마를 들여 놓고 남은 밥으로 김밥을 말았지요. 당신은 갖가지를 넣고 둥글게 말아서 칼로 곱게 썬 김밥은 맛이 없다고 자기 식으로 싸겠다구 우겼구요. 김에다 밥을 길게 펴고 손으로 찢은 김치를 줄지어 늘어 놓고 사이 사이에 멸치볶음을 박아 두었어요. 그러곤 그냥 길다랗게 둘둘 말았어요.

이걸 한 손아귀에 쥐구 위에서부터 덥썩 베어 물어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그런 김밥은 당신의 유년시기인 전쟁 때나 아니면 내 세대 정도는 경험했던 전후의 어려운 시절에 소풍 가서 먹었거든요. 신문지에 둘둘 말아 싸온 김밥에서는 드문드문 잉크 냄새가 배었지요. 김은 나무껍질처럼 말라붙어 있었으며. 속은 투박한 보리알이 대부분이라 한 입 깨물적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구멍이 꺽꺽해서 잘 넘어가지도 않았죠. 당신이 우겨서 그래도 요즈음은 나아진 세상이라 하얀 백로지에 도시락을 쌌어요. 참기름도 듬뿍 발라서요.

우리는 도시락과 물병만을 넣은 작은 쌕을 메고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내가 언젠가 써두었지만 당신이 여길 떠난 뒤에 뒷산엘 가끔 올라갔어요. 몇 달에 한번쯤이었을 거예요. 꼭대기는 다시 다른 능선으로 이어져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정말 잊혀진 것 같은 외로운 무덤 하나가 있고 왼편으로 돌아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더 위로 올라가면 다른쪽 능선의 가장 높은 데가 나왔지요. 우리는 땀을 흘리고 숨을 헐덕거리면서 덤불을 헤치고 위로 올라갔어요. 한 시간쯤 걸려서 꼭대기에 오르니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 이쪽으로 휘어져 들어오기 때문에 한번도 넘어가 본 적이 없던 골짜기의 반대편이 내려다 보였어요. 그리고 그 넘어에 있는 먼 산의 푸른 그림자도 보였구요. 갈뫼의 어구를 흘러 읍내로 내려가는 개천의 상류도 보였어요.

현우씨 여기서 좀 쉬었다가 점심 먹자.

겨우 여기서? 저 왼편에 좀더 높은 데가 있는데.

아냐, 우리 뒷산의 끝은 여기야. 목적지에 다 온거라구.

하면서 나는 풀 위에 주저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신은 내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아 일으켰어요.

목적지가 어딨어? 여기선 아무 것두 보이지 않잖아.

당신이 내 손을 잡아 끌면서 능선을 달려 내려갔지요.

저 위에 올라가면 근사한 게 보일지두 몰라. 화가가 뭐 이래?

우리는 다시 죽을 고생을 하면서 맞은편의 능선으로 올라갔지요. 나는 당신의 뒤에 쳐져서 한참이나 다리 쉬임을 하다가 뒤뚱거리며 올라갔는데 먼저 당도한 당신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저길 봐! 저게 세상이라니까.

나는 그런 뒤에도 한참이나 걸려서 정상에 당도했어요. 하늘이 저어 끝까지 활짝 열려 있더군요. 끝간데 없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작은 언덕에는 꽃으로 하얗게 또는 분홍으로 물든 과수원이 내려다 보이고 이곳 저곳 언덕을 등지고 마을들이 엎드려 있고 또 그 넘어에는 번화한 중심지가 가물가물 내다보이는 거예요. 자동차들이 무슨 작은 벌레들처럼 고물고물 움직이구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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