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끝을 나타내는 마침표는 먼지 한 점 만한 크기밖에 되지 않지만 사실은 글쓰기의 체계를 확립한 주역으로 찬양받아 마땅하다. 마침표가 없었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영영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침표는 하나의 생각이 완결되었음을 알려준다.’ 하나의 문장이 마침표로 끝나고 또다른 문장이 시작되듯 역사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도 이렇게 이어진다.
파리특파원 출신의 언론인 주섭일씨가 쓴 신간 ‘프랑스의 대숙청’은 프랑스의 전쟁영웅 샤를 드골이 나치에 협력한 민족반역자들을 가차없이 응징, 처단함으로써 치욕의 역사에 뚜렷하게 마침표를 찍고 그 바탕위에서 자랑스러운 민주국가 프랑스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과정을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는 어떠했느냐고 묻는다.
해방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됐지만 이승만(李承晩)이라는 ‘현실주의 정치인’에 의해 바로 흐지부지돼버려 반민족세력이 처단되기는커녕 새 독립국가의 지배세력으로 재등장함으로써 해방이후 현대사가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책 여러곳에서 반복기술하고 있다.
▼잊혀진 19년전 그날 ▼
내일은 5·16군사쿠데타 38주년, 그리고 18일은 19년전의 광주를 생각케 한다. 우리는 80년5월에 누가 민주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라고 명령했는지를 아직도 모른다. 그때 몇 명이 동포의 총칼에 생명을 빼앗겼는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벌써 잊어버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을 비롯한 5공의 사람들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남녘 목포도 가고 경상도도 북과 남을 오간다.
그들은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이름 아래 구속돼 반란죄 내란죄 등으로 무기에서부터 수년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 지 불과 8개월만에 너무도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옥문을 나섰다.
은전을 받는 사람이 진정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참회를 할 때 비로소 사면은 정당성을 갖는 것이지만 전씨의 태도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즘 그의 행태는 더욱 그렇다.
다른 달도 아닌 5월에, 그는 부산 경남지역 이 절 저 절을 나 보라는 듯이 돌아다니며 이미 ‘정치’를 시작했다. ‘80년, 5월, 광주’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게 없다. 전씨의 속뜻을 모르고 국민회의 관계자가 그의 망월동 묘역참배를 추진한다는 얘기가 들리자 전씨측은 단호하게 말했다. “과거사 정리와 동서화합이라는 명분은 좋지만 5·18사건의 성격과 책임소재 문제에 대한 양측의 상반된 인식은 좁혀진 게 없다.”
상반된 인식? 그렇다. ‘5·18’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인식과 그들의 인식은 다르다. 아무리 5공청문회를 하고 1, 2, 3심 재판을 다 거쳐도 그들의 생각은 한점 변한 게 없다.
▼역류하는 5월의 역사 ▼
그런데 5·18의 최대피해자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측근들이 전씨를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이곳저곳으로 모시고 다니려하고 ‘훌륭한 분’이라고 치켜세운다. 그 속뜻을 알 수 없다.
이른바 동진(東進)책략 때문인가. 광주에 총을 겨눈 그들을 내세워 경상도에서 한나라당의석을 몇석 뺏어온다고? 그래서 전국정당이 된다고? 권력은 ‘표’에서 나오고 국회의석수로 승부가 난다고? 이런게 정치라고?
오히려 한나라당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5공세력의 정치재개는 김대중정권의 방조아래 이뤄지고 있다. 현정권은 학살과 부정부패 원흉인 5공세력과 손을 잡을 것인지 확실히 밝혀라.”
5·16쿠데타와 유신독재하에서도 최대피해자인 김대통령은 대구 경북지역을 찾아가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의 ‘근대화 업적’을 주저없이 찬양했다. 정치가 무섭다. 모든게 혼란스럽다. ‘5월의 역사’는 역류(逆流)하다가도 언젠가는 제길을 찾아갈 것인가.
베르테르의 슬픔이 아닌, 5월의 아픔을 끝내는 마침표는 언제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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