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작년 9월 각 부처에 대한 진단을 19개 민간전문기관에 맡기기로 국무회의에서 결정했다. 행정서비스를 기업경영처럼 평가해 과감한 정부 구조조정에 나서겠다는 얘기였다. 뭐 좀 달라지나 싶었다. 17부 4위원회 2처 16청에 대한 진단에는 세금 46억원이 들어갔다.
민간진단팀은 2월말 두툼한 책 50권 분량의 진단결과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진단팀 관계자에 따르면 각 부처의 생산성과 건강상태 및 병증(病症)이 자세하게 체크됐다. 어느 부처 어떤 조직은 놀고 먹고, 어떤 조직은 절반으로 줄여도 문제가 없다는 식의 내용까지 담긴 모양이다. 진념(陳稔)기획예산위원장도 각부처 과(課)단위까지 일일이 진단한 보고서라고 시인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보고서 전모에 접근할 수가 없다. 전문을 비밀로 분류해 행정자치부와 기획예산위가 어디엔가 꼭꼭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언론의 공개요구에 대해 정부는 “언젠가는 공개할 것”이라며 자기 편의에 따라 극히 일부만 슬쩍슬쩍 흘리는 데 그치고 있다.
국민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빠 자신이 낸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일일이 알아보러 다닐 수가 없다. 그래서 언론이 정보배달부 역할을 한다. 언론에 대한 정보공개 거부는 국민의 알 권리 봉쇄, 바로 그것이다.
민간기업에 대해서는 투명성을 요구하면서 정부는 수십조원의 세금을 어떻게 쓰는지, 자신들의 경영상태는 숨겨도 좋은가. 그것은 납세자에 대한 정부의 배임이다. 비싼 진료비 써가며 정밀진단은 뭣 때문에 받았는지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이 나라에는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이 엄연히 살아있고 이 정부는 ‘국민의 정부’라고 문패를 달지 않았는가.
정부 경영진단서 은닉은 기묘하게도 옛 공보처 부활과 동시에 진행됐다. ‘국정 전반의 상세한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한다’는 명분 아래 진단팀 의견과는 동떨어진 거대조직 국정홍보처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동안은 그런 조직이 없어서 정부경영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공개하지 못했으며, 이번 진단서도 감추고 있는 것일까.
결국 정부조직개편은 부처별 진단서에 대한 공개적 검증없이 진행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로비가 난무하고 각부처와 공동여당간의 파워게임에 따라 조직의 성쇠가 엇갈렸다. 구조조정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진단서를 손에 쥐고도 이를 공표하지 않으니 당하는 쪽도 “너 죽을래”라고 협박까지 하면서 막무가내로 버틴 것이다. 개혁을 한다면서 반개혁적 밀실행정을 반복해 저항을 증폭시킨 셈이다.
진위원장은 “보고서를 공개하면 각부처 과장들까지 로비에 나서고 공직사회가 지나치게 동요할 것 같아 대외비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면 보고서를 공개해 여론의 힘을 빌려서라도 터무니없는 로비나 정치적 뒷거래는 막았어야 했다.
한편 행자부측은 이제 와서 진단팀이 잘못 판단한 것도 적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드러내놓고 검증해봤어야 옳았다.
보고서 은닉은 말로는 ‘민주적이고 투명한 정부’를 되뇌지만 여전히 ‘권위적이고 음습한 정부’임을 잘 보여줄 뿐이다. 구린 데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진단팀 관계자는 “보고서 전모가 공개될 경우 일부 부처의 세금낭비와 부실, 정책변질 과정과 원인 등이 드러날 소지가 많다”고 말했다.
정부경영이 부실할수록 국민은 그 실상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짜 개혁의 가능성도 열 수 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보고서를 공개해야 한다. 보고서 공개 여부는 이 정부의 정체(正體)를 보여주는 한 잣대가 될 것이다.
보고서를 계속 감추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 ‘각부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해 관료사회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것이 경영진단의 더 깊은 뜻’이라는 풀이가 청와대측과 교류가 있는 진단팀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배인준<논설위원>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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