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인 백남준 역시 가족의 꽁무니를 따라 배를 타고 고베로 향하였으며 부친이 집을 마련해놓은 최종 목적지 가마쿠라로 향하였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국교가 없었지만 백남준은 홍콩에 살던 시절, 부친회사의 주재원 신분으로 일본의 통과비자를 받아놓은 것이 있어 일본에 문제없이 입국할 수 있었다.
6·25의 폐허를 겪고 있던 당시 한국인들의 아픔과는 매우 동떨어진 생활패턴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부친의 준비 덕에 백남준은 도쿄대학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니 삶이란 각자 미묘한 길이 있는 모양이다.》
백남준이 청소년기에 아무리 천재적이었다고는 하나 설마 그가 재수도 안하고 도쿄대학에 들어갔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집안의 대이동 등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현대로 스타르타 식 시험공부의 결과로 1951년 도쿄대학 미학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으며 향후 다양하게 그의 인생과 결부되는 일본과의 인연들이 시작된다.
백남준이 도쿄대 미학과에 입학하였다는 소식은 그의 예술적 재능을 익히 알고 있던 형제들에게 크나큰 기쁨과 위안을 선사한 대신 상과대학에 가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그의 부친에게는 상대적으로 큰 실망의 동기도 되었다. 백남준은 일생동안 부친과 나누어 본 이야기를 다 합쳐도 한시간이 채 안될 것이라고 늘 말해왔다. 그만큼 대화의 소재가 달랐기 때문이었을까.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사업가 아버지와 예술가 아들이 나누어야 할 이야기의 중심을 얼른 예측하기 어렵지만 끝까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진지한 대화 한 번 변변히 나누지 못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백남준은 도쿄대학 재학시절 처음 2년간 전공이 정해지지 않았으나 3학년이 되어서야 미학과 미술사가 동시전공인 본과에서 수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미학을 타케우치 토시오(竹內敏雄)교수로부터, 음악학은 노무라 요시오(野村良雄), 작곡은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郎), 시라이시 아키오(白石顯雄)교수로부터 배웠다. 특히 백남준은 당시 음악사를 가르치던 노무라 요시오 교수를 매우 존경하고 있었으며 그는 당시 일본사회에서는 드물게 기독교인에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던 경력을 가진 평화주의자였다.
또 위에 열거된 학자들은 전후 일본의 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백남준이 이들을 통하여 본격적인 예술세계를 만나게 된 것은 어쩌면 그의 향후 예술세계를 열어 가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백남준이 도쿄대학에 재학하던 50년대에는 한국인 학생 수가 적었다. 해방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데다가 또 전쟁 중이어서 내왕이 그만큼 뜸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으로는 도쿄대 출신의 전 언론인이며 6·25때 일본으로 건너간 김상규의 아들 김철이란 사람이 문학 전공자로 평소 백남준과 가까운 사이였다. 김철은 후에 일본의 호세이대(法政大)교수를 역임할 정도로 뛰어난 지식인이었으며 일본문학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밖에 공과대학에 선우 모와 김 모 등이 있었고 농과대학에 한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백남준은 도쿄대학 재학시절 음악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2학년 때에는 드뷔시에 관한 논문까지 썼다. 백남준은 이 논문을 당시 도쿄대학에서 발행하던‘동무’라는뜻의교내잡지‘카마라드’에투고하였으며같은해 수록되었다.
이 논문은 지난 1984년, 그가 도쿄에서 첫 전시를 가질 당시 도쿄도미술관(東京都美術館)의 큐레이터 유루기 야수히로(萬木康博)가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천재도 연륜은 못속였는지 최근 이 논문을 다시 읽어 본 백남준은 별로 자랑할게 없는 “매우 실망스러운 논문”이라고 계면쩍게 자평한 적이 있다.
백남준은 도쿄대학 재학시절 총명한 학생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주로 음악서적과 철학서적을 읽었다. 그가 가깝게 지낸 친지로는 일본인 가운데 나가시마라는 사람이 있었으며 한국인으로는 백남준보다 선배인 음악전공자 이현웅이 있었다.
이현웅은 후에 일본음악콩쿠르에서 1등 상을 받을 정도로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간혹 백남준의 신세를 졌는데 백남준은 그에게 생활비도 주고 음식도 사주었다.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음악세계를 꽃피우지 못하였다. 백남준은 지금도 이현웅의 음악실력을 기억하면서 가난으로 시든 한 조선인 음악도의 과거를 아쉬워한다.
백남준이 도쿄대학 출신이라는 점은 그에게 하나의 명예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제국대학 출신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부담도 있다. 일본인들은 백남준이 도쿄대학이 길러낸 인재라는 사실을 언제나 자랑한다.
도쿄시내 한복판에 있는 도쿄도미술관에서 그가 대형 회고전을 갖던 1984년의 일이다. 이 전시는 당시 일본국제교류기금에 근무하던 후미오 난조(南條史生)와 큐레이터 유루기가 마련하고 NHK가 그의 퍼포먼스를 현장 중계하였으며 일본인 지식인과 좌담 프로그램도 마련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도쿄대 출신이라는 약력이 소개되었을 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치 일본이 길러낸 영웅처럼 대접하였다. 그런데 그 영웅이 퍼포먼스에서 한 것이라고는 피아노 한 대를 신나게 때려부순 것이 전부였다.
그의 삶에 일본과의 인연은 단순히 도쿄대학 출신이라는 사실이외에도 다양하게 얽혀 있다. 그의 부인인 쿠보다 시게코 여사가 일본인이며, 나중에 언급되겠지만 테크놀로지예술로 가는 첫 기술적 시험장소가 일본이라는 점, 일본에서 처음 생산한 소니사 제품의 비디오 카메라를 사용하여 비디오예술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등이 그것이다.
1956년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그가 독일로 간 1956년 이후에도 일본의 잡지 ‘음악학’이나 ‘음악예술’은 그에게 고정 지면을 내주면서 독일현대음악의 최신소식을 전하게 하는 등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백남준이 음악학에 기고한 글 가운데는 나중에 그의 예술적 인생과 깊게 관련되는 1957년 다름슈타트 하계 음악페스티벌을 비롯하여 독일에서 직접 기획한 좌담회까지 폭넓게 구성되어 있다.
백남준은 독일로 유학간 다음 한국에도 유럽음악계의 소식을 전해왔다. 자유신문에 다섯 차례 기고된 그의 글 가운데는 구체음악에 관한 글과 더불어 피터 셰페르에 관한 소개가 자세하게 실려 있다. 당시 발행되던 자유신문은 그의 형 백남일씨가 사장으로 재직중이었다.
이용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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