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우습게 본다’는 연극 같은 개각, 또 하나의 연극 같은 ‘고급옷 뇌물 사건’, 언론을 겁주는 천문학적 규모(1백1억원)의 한겨레신문을 상대로 한 국민회의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 등 희한한 사건들이 지난주 초부터 지면을 장식했다. 다양성의 관점에서 이런 문제들에 관한 보도를 살펴본다.
다양성에는 최소한 두 가지 요건이 있다. 하나는 다루는 주제가 다양한 독자 또는 국민의 관심사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한 주제를 다루면서 다양한 정보와 견해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신문들은 다양한 계층의 독자 또는 국민의 관심사와 견해를 고르게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계층의 관심사와 견해를 훨씬 더 크게 보도한다.
예컨대 지난주 초에 단행한 각료 및 차관급 인사만 해도 그렇다. 4,5개 면에 걸쳐 대서특필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일반 국민은 누가 장차관이 되든 큰 관심이 없다. 누가 되든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현정부의 행태도 변하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그들의 생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느낀다. 조사를 해보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수십 명의 새 장차관 가운데 일반 국민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도 손숙 김태정씨 정도가 아닐까.
오로지 장차관급 인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란 이른바 ‘정치 계급’일 뿐이다. 정치 계급이란 정치인, 정당 주변에 출몰하는 인간들, 중간 및 고위 공직자, 기업과 단체의 간부 및 로비스트, 기자 등을 일컫는다. 이런 사람들의 관심사와 견해를 더 많이, 더 크게 보도하는 것이다. 한국의 모든 종합 일간지가 엘리트 독자와 대중 독자를 동시에 표적으로 삼는 것도 문제지만, 그러면서도 특정 계층의 관심사를 더 크게 보도한다면 이중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 때 ‘독자의 눈 높이’로 신문을 제작한다는 말은 허구가 된다.
더구나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중산층이 붕괴하고 한계 집단은 늘어나고 빈부 격차는 더 벌어졌다. 신문은 우리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하층 사람의 관심사와 견해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서울역 지하도에 노숙자가 잘 보이지 않으니 실직자 보도도 자취를 감춰 그 많던 실직자가 모두 일자리를 얻은 듯 의사(擬似) 환경을 조성한다. 적어도 신문만 보면 그렇다. 그들은 한국 신문 보도에서 이미 ‘잊혀진 영역’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동아일보 27일자 A23면의 ‘발 묶인 어민, 눈물의 바다’는 참 좋은 기사이다. 다만 여러 기자를 동원한 생생한 현장 르포인데도 단 1회로 끝낸 것이 아쉬울 뿐이다. 보통 사람의 생활 현장과 그들의 관심사를 반영한 기사를 더 발굴해 주기를 기대한다.
지난 주 서민을 충격과 허탈과 분노에 휩싸이게 했던 ‘고급 옷 뇌물’ 기사도 보통 사람의 건실한 생활 기사, 실직자의 참혹한 생존 현장 기사와 더불어 보도했더라면 현정권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가 더 실감있게 드러났을 것이다.
덧붙여 비록 타 언론사의 일이지만 동아일보가 언론 자유의 입장에서 국민회의의 경솔한 ‘1백1억원 소송’ 문제점을 29일자 A1, A4, A5면에 걸쳐 기사와 사설로 중점 보도한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본다.
이민웅<한양대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