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33)

  • 입력 1999년 6월 3일 19시 13분


형 얼릉 끊읍시다. 우리는 형님 건강을 젤로 걱정하고 있소. 도 딱는 심 치쇼잉. 안녕히 계시우.

나는 입 속으로만 잘 있어라, 하면서 말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최동우는 비판 받을 만 했다. 잠수하는 활동가는 검거되지 않는 것이 제일 첫 번째의 임무라고 수칙에는 그렇게 적어 두었지만 그걸 지키기는 누구에게나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생활에서 유리되어 있으면서 추적의 그물이 조여오면 올수록 전투적으로 변하면서 온 세상과 더불어 싸우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조급성과 좌경에 기울기 마련이었다. 동우는 공장 지역에서 작은 월세방을 얻어 사는 예전 노동자 동료의 집에 은거해 있으면서 학습조를 운영했다. 처음에는 출판사에서 나온 그 무렵의 강도는 낮지만 실무적인 책들을 중심으로 학습을 시키다가 차츰 일어판 책으로 옮겨갔고 나중에는 저쪽 책을 노트에 필기해서 다시 그 내용을 서로 적어 놓고 필기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건이가 검거된 뒤에도 그 곳을 떠나지 않고 더 나아가 통신문을 공장 밀집 지역에서 돌리기 시작했다. 기능공 출신의 관리자 한 사람이 공장에서 학습조원의 통신문을 보게 되고 이어서 술 자리에 데려다 슬그머니 캐물었고 그는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그가 밀고를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기관에서 끈을 길게 풀어 두고 근접 거리에서 내사를 한 것은 틀림이 없었다.

새벽 세 시에 그들은 동우를 덮쳤다. 항쟁이 터지기 훨씬 전인 유신말기부터 잠수했으니 그맘때쯤엔 지쳐 있었겠지. 그는 쇠파이프를 준비해 두고 있어서 처음에는 그걸 휘두르며 저항하다가 틈이 엿보이자 뒤 창문으로 뛰어내려 남의 집 담장을 넘어 이전처럼 지붕을 타고 달아났다. 하지만 몇번이나 실패한 경험이 있었던 그들은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가 그가 골목을 벗어나 도로를 향하여 달리자 곧 대기시켜 두었던 오토바이가 따라갔다. 오토바이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어서 하나는 앞에서 핸들을 잡았고 다른 자는 뒷자리에서 곤봉을 휘두르며 추격했다. 오토바이가 뛰고 있는 동우의 두어 걸음쯤 앞질러 나가자 뒷자리의 사내가 곤봉을 휘둘러 동우의 뒷통수를 타격했다. 동우는 공처럼 가볍게 튀어오르며 핑글 돌아서 아스팔트 바닥에 큰대자로 나가 떨어졌다. 물론 그는 기절했다. 그는 조사실로 끌려가기 전에 우선 병원 응급실로 가서 터진 머리를 꿰매고 혼수상태에서 깨어날 때까지 링겔 주사기를 꼽고 누워 있었다. 다행하게도 그들의 잘못으로 검거 당시에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아프다는 핑계로 그는 나흘 동안 묵비권을 행사할 수가 있었다. 그는 나흘이라는 황금 같은 시간을 벌었다. 그 사이에 동우는 자신의 머릿속을 정리했다. 우선 그가 저질렀지만 어려운 형편에 있는 노동자들의 이름을 지우고 대신에 외곽에서 건이의 통신문을 받으며 관리되어 오던 학출들로 채웠고, 그가 기거했던 곳에 있는 예전 노동자 친구들의 이름만은 몇 사람 떠올려서 사실을 최소화시켰다. 그는 이 그림대로 조금씩 야금야금 뱉어 놓으면서 두 달 가까이 고문에 맞섰다. 아, 다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성기와 항문이 전기 충격에 얼마나 민감한 장소인가는 밖으로 폭발할 것처럼 튀어나오는 자신의 두 눈알밖에 모른다. 동우는 먼 바다의 수평선 위로 가물거리는 작은 고깃배까지 내다보던 바닷가 소년이었는데, 그는 아주 두터운 안경을 써야하는 최악의 근시로 변해버렸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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