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자세만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괜찮아요. 하지만 생각은 같은 흐름으로 가야할 걸.
무슨 생각?
그네는 붓질을 멈추고 오히려 붓을 세워 들고서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와의 원근감을 눈으로 관측했다. 나는 좀 졸린 듯한 기분으로 무력하게 그네의 붓끝에 얹힌 날카로운 눈길을 응시했다.
지금 이 자리만 생각해야 돼요.
윤희가 붓질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에 그네는 몇번 목탄이나 콘테로 화첩에다 나의 초상을 소묘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윤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그림쟁이라면 우선 닮거나 최소한 비슷하게 그리는 게 기본 실력을 보여주는 짓이 될 터였다. 어떤 것은 내가 보기에도 사진이나 거울에서 보아오던 내 특징들이 잘 살아나 있었지만 대부분은 나하고는 어딘가 다른 데가 있었다. 나는 먼저 나와 닮았다고 생각되는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마음에 든다고 말해주었는데 윤희는 나와는 반대로 바로 그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의 얼굴은 그냥 주전자나 물컵이나 사과 같은 정물이 아니거든요. 사람의 얼굴은 표정이에요. 마음이 투영되고 있는 그릇이지요. 그림을 그리는 자는 그걸 보아야 해요. 더구나 우리는 늘 함께 있잖아요.
윤희는 지금 물감을 찍어 기초 스케치를 빈 캔버스 위에 해나가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모르죠. 당신이 떠난 뒤에나 완성될지….
나는 잠깐 저 아늑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렇지만 너무도 또렷한 많은 자잘한 일상이 계속 되었던 지난 몇 달 동안을 떠올렸다. 봄이 오는 느낌에서 그것이 깊어지고 풍요롭게 변해가던 것이며 비와 바람과 천둥과 그리고 새소리 물소리 등이며 우리가 함께 찾아냈던 빨래터와 낚시터며 물 웅덩이와 고기떼들과 물풀 냄새를 생각했다.
꼭 가버리라고 등을 떼미는 것 같군.
윤희는 손을 놀리면서 무심한 듯한 투로 말했다.
나 신문 봤어요.
갈뫼에서 이런 살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는 외부 세계를 안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에 합의를 보았다. 나는 가끔씩 라디오의 뉴스를 듣고 있었지만 배달하는 이가 규칙적으로 집을 방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신문은 구독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어딘가 조금 답답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라디오 뉴스를 듣는 일도 번거롭고 부담스런 노릇이 되어서 그마저 듣지 않으니 나는 차츰 편해졌다.
학교에서 우연히 봤는데….
하는 수 없이 나도 말했다.
나두 봤어. 읍내 중국집에 자장면 먹으러 갔다가.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왜 나한테 말 안했어요?
그대가 걱정하실까봐.
나는 일부러 쾌활하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시늉으로 말했다. 윤희는 붓을 놓더니 이젤 앞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갑자기 달려들어 내 머리를 두 손아귀에 쥐고는 가슴 안에 끌어안았다. 그네의 몸에서는 솔 향내 같은 텔레핀 냄새가 강하게 느껴졌다.
<글: 황석영>
구독
구독 14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