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친 김에 한국 만화를 보기로 했다. 21세기는 여성성(여성과 같은 뜻은 아니다)이 우위를 점할 거라는 다니엘 벨의 예측이 주효한 것일까. 알고 보니 90년대 들어 한국 극만화도 소설처럼 주로 여성 작가들이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그 중 ‘언플러그드 보이’라는 다소 귀에 선 제목을 달고 있는 만화를 통해 나는 만화라는 장르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만화란 현실과 환상이 절묘하게 배합돼야 한다. 즉 디테일은 사실적이고 섬세해 청소년의 감정을 대변하되, 스토리나 그림은 꿈을 줄 수 있도록 적당히 과장되고 미화돼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말해 만화라는 장르를 이해한 것보다, 그 만화를 즐겨 보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 나로서는 더 큰 소득일는지도 모른다. 중학생 딸을 둔 어머니로서 그애의 침대머리를 떠나지 않는 만화책을 늘 못마땅해했는데 그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공동향유자의 의사소통이야말로 문화의 힘이자 저변이 되는 건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박물관에도, 그리고 딸애가 좋아하는 노래방에도 문화는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가 보수성, 그리고 다양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고의 경직성에 있지 않은가 한다. 말하고 주장하는 방식부터가 그렇다. ‘하나비’를 만든 다케시 감독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보는 사람만 없으면 버리고 싶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것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 그를 패륜아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약과 혼음 따위를 적극적으로 즐겼다고 다소 과장을 섞어 늘어놓은 ‘달콤한 악마가 내 안에 들어왔다’에서의 무라카미 류도 마찬가지다. 작가라는 사회적 공인으로서 결혼한 남자가, 더욱이 소설도 아닌 에세이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라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들은 표의를 활용한 말의 기술을 부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거기 비하면 우리의 인터뷰는 상상력을 허용하지 않는다. 말 따로 생각 따로의 이중성을 키울 뿐이다. 그러다보니 말하는 방식은 또 얼마나 재미가 없는가. 주장하는 내용은 논리적이지 않으면서 말하는 태도의 선정주의만으로 주목을 받는 일까지 생기는 것이다.
농담과 반어법을 이해 못하는 엄숙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추호의 거리낌없이 자기의 경직성을 진지함이라고 우기고, 욕망의 재생산을 의로운 투쟁이라고 선동해대는 데는 할 말이 없다. 마치 이 글을 일본문화 예찬이라고 읽는 사람에게 대꾸할 말이 없는 것처럼.
은희경(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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