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41)

  • 입력 1999년 6월 13일 19시 53분


나는 사실은 닭고기라면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았지만 우리 지난 여름 동안 식단이 얼마나 부실했어요? 밭에서 기른 푸성귀로 여름을 났잖아요. 아 참, 그러구보니까 당신이 잡아온 참붕어 조림은 맛있었어요. 당신이 일러준대로 갖은 양념에 고추장과 엿물을 넣고 묵은 간장으로 간간하게 맞추어서 약한 불로 오랫동안 조렸더니 뼈까지 흐물흐물해졌지요. 내가 퇴근해 오면서 장을 보아오면 당신은 어린애처럼 달려들어 비닐 봉지를 헤쳐보며 뭘 사왔는지 확인해요. 내가 어쩌다 콩고물 녹두고물을 입힌 찰떡이나 참기름 바른 쑥 절편을 사오면 당신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먹었어요.

우리 삼계탕 해먹자.

내가 그랬더니 당신은 수염이 듬성듬성한 얼굴을 부엌으로 내밀며 엉뚱한 소리를 했지요.

오늘 무슨 복날인가?

다 늦게 복날은 또 뭐야. 내일은 육계장 해먹어요.

갑자기 왜 그래. 요즘 선생들 월급 올랐나?

아니, 여름내내 복날두 못챙겼으니까 한꺼번에 사흘에 몰아서 치를라구 그래.

나는 닭의 비워진 배에다 삼이며 찹쌀이며를 채우고 흰실로 꼼꼼하게 꿰맸어요. 그런데 솥에서 끓기 시작하자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더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거 있죠. 나는 당신이 눈치 못채게 입을 꼭 다물고 손으로 입술을 움켜쥐고 뒤꼍으로 돌아 나갔어요. 땅을 향해 쭈그리고 앉기도 전에 와악 하면서 토했어요. 별로 나올 것두 없이 물기만 조금 뱉어냈는데 계속 메슥거리는 거예요. 나는 속으로 걱정도 되고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당신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해야 했어요. 우리가 갈뫼에서의 삶을 연장할 수만 있었다면, 그리고 당신이 혼자만 아늑하게 숨어 있다는 자책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않았다면 나는 말했을 거예요. 나는 당신을 보내고 우리 둘만의 일을 치러내야 했지요. 정희에게 연락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우선 당신이 편한 마음으로 그 과정을 치러내야 하는 게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중요했답니다. 나는 무기를 들고 싸웠던 이들도 운좋게 살아남아 그 해 광복절에 사면되는 걸보고 용기를 내기로 했던 거예요. 당신이 끝도 없는 캄캄한 함정에 빠져버릴줄도 모르고. 그러나 그이들은 이제 막 출범한 정권의 선심과 맞바꾼 인질이었고 당신과 당신의 벗들은 또 다른 억압적인 현실을 합리화할 수 있는 희생물이었던 셈이에요.

현우씨 나 학교 쉬기루 했다?

그랬더니 당신은 별로 걱정두 안하는 거 같더라구요.

어 그거 잘됐네. 쉬는 동안 공모전 준비라두 하지 그래. 그림이나 열심히 그리면 되잖아.

나는 조심 조심 하면서 그후 며칠 동안의 내 감정을 조절했어요. 그러고 있는데 가을을 알리는 태풍이 몰아쳐 왔지요. 나는 오렌지 색의 과꽃이 피어나자마자 찬비에 떠는 게 보기싫어서 차라리 한아름 꺾어다가 고추장 단지로 쓰던 통통한 항아리에 갖다 꽂았어요. 우리는 툇마루에 서서 비바람에 나부껴 흩날려가는 나뭇잎들을 내다보았지요. 그리고 덧걸이 헛간에서 찢어진 종이상자를 깔고앉아 아궁이에 불을 때던 생각이 나요. 당신이 먼저 잔솔가지들을 넣고 불을 살랐어요. 여린 불꽃이 바자작거리며 가지에서 가지를 타고 낼름낼름 위로 타올라가더니 불길이 한꺼번에 커지겠지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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