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45)

  • 입력 1999년 6월 17일 19시 24분


내가 비포장 도로를 기우뚱거리며 달리기 시작한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비틀대는 걸음으로 얼른 통로를 뛰어가 버스의 뒷창문으로 윤희의 마지막 모습을 본 것은 흘낏, 하는 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뒤에 오랜 세월을 독방에 살면서 몇번이나 되풀이하여 그려본 영상이 되었다. 우산을 쓴 그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고 다만 한 손에 손전등을 켜들고 있어서 아랫도리의 치마가 바람에 펄럭이는 모양만 보였다. 그 치마는 윤희가 오 일 장에 나가서 사온 꽃무늬 포플린 치마였는데 실은 나이 먹은 아낙네들이나 부엌 일을 할 때 허드레로 입는 옷이었다. 한데 별나게도 윤희가 그 옷을 입으면 자잘한 꽃무늬가 화려하게 보이고 갓 시집 온 새댁처럼 보였다. 나는 그 치마에 맨발에다 고무신을 신은 윤희의 소탈한 모습을 좋아했다.

환절기에 비오는 밤이 되면 나는 화장실의 비닐창문을 열고 창살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 보곤 했다. 내 방은 복도의 끝이어서 맞은편 건물이 끝나는 곳에 서쪽으로 열린 시야를 통하여 들판과 산이 내다보였다. 그 산모롱이를 굽돌아가는 마을 길이 있어서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계절이 바뀌는 풍경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길목에는 언제나 까치가 몇 마리씩 올라가 경쾌하게 부르짖는 감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경운기가 세워져 있거나 여름이면 그늘에서 쉬고 있는 농부들도 보였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을 아낙네들이 다리쉬임도 하고 가는 게 보였다. 나는 가끔씩 감나무 아래 공간이 비어 있을 적이면 거기에 윤희를 세워 보았다. 윤희는 바람에 날리는 포플린 꽃무늬 치마에다 코가 오똑한 고무신을 신고 우산도 없이 그냥 맨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서 있었다. 오랫동안 내다보고 있노라면 저녁 해가 기울고 길만이 하얗게 남고 주위는 어둠에 묻혀버렸다. 그런데도 윤희의 자취는 거기 서있었다. 가끔씩 담당이 시찰구로 들여다보고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일깨워 주었다.

천사백 사십사 번! 뭘하는 거요?

그러면 나는 겸손하게 말없이 돌아보며 빙긋이 웃어 주었다.

외출 중이오?

그래도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웃었다. 나중에 숙달이 되니까 밤에도 나는 윤희를 거기 세워둘 수가 있게 되었다. 비오는 날 밤에 내가 창살가로 나서는 것은 윤희의 치맛자락을 재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꿈에서는 내가 그네의 가까이에 서있었다.

내가 갈뫼를 떠나 광주에 도착한 것은 밤 열한 시가 넘어서였고 도망자인 나에게는 움직이기에 아주 맞춤한 시간이었다. 나는 야행열차에 올라 의자에 쓰러져서 잠들었다. 레일 위에 끊임없이 걸리는 쇠바퀴 소리를 들으면서 자다가 깨다가 했다. 잠이 덜깬 눈으로 고개를 들어 낯선 고장의 역사를 내다보면 도착한 두어 사람이 짐을 들고 돌아가거나 또는 떠나는 사람들이 기차에 올랐고 전송 나온 듯한 식구들은 손을 흔들며 웃어 준다. 아니면 아예 외등만 켜 있고 텅 빈 작은 역사가 꿈결에서처럼 천천히 흘러 지나갔다. 나에게 이제는 출구가 사라졌다. 나는 서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내가 돌아갈 집을 머릿속에 그리자 갈뫼의 오두막이 먼저 선명하게 떠올랐고, 몇년 동안 들러보지 못했던 어머니와 아우가 사는 북한산 아랫녘의 개나리 울타리를 두른 집은 나중에야 생각이 났다. 나는 마지막으로 집에 들러서 어머니를 뵈어야 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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