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49)

  • 입력 1999년 6월 22일 19시 26분


나는 역시 진지하게 대답해주려고 애를 썼다. 명헌이도 그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그냥 한마디 내게 해주었을 뿐이다.

내가 그런줄 알았다구. 눈이 게게 풀렸더라구. 헌데 이걸 어쩌나. 너는 별을 수십개 달아두 모자랄텐데.

함진애비 술을 미리 내라고 지금은 신랑이 궁하니 자기가 꾸어 준다고 온갖 궁리를 해서 술판을 벌이려는 명헌을 간신히 떼어 놓고 나는 호선이도 다시 만나지 못하고 화실을 나섰다. 시내에서 어정거리기보다는 수유리 부근으로 가서 어디 산등성이에라도 올라가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려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학생 시절에 친구들이 밤 늦게 찾아오면 일단 어머니가 잠 드실 무렵까지 기다리노라고 소주 사들고 동네 뒷산에 올라가 과자 한 봉지 놓고서 술판을 벌이던 일이 생각났다. 버스 종점에서 버젓이 내려 옛날처럼 소주 한 병과 새우깡 한 봉지 사들고 우리 동네로 가는 골목을 일부러 피해 빙 돌아서 산으로 올라갔다. 눈에 익은 오솔길이 나왔고 이맘때면 김장 배추를 심던 그 밭두렁도 나왔다. 밭두렁 위쪽에 오래된 무덤 하나 있어서 그 자리가 우리들의 판이었던 것이다. 나는 제법 쌀쌀한 야기에도 기 죽지않고 잔디 위에 털퍼덕 퍼질러 앉아서 소주를 병째로 들어 한모금씩 마셨다. 두어번 그렇게 하고나니까 볼따귀와 목 언저리가 후끈해지기 시작했다. 거기서는 우리 집의 개나리 생울타리며 이웃집의 높다란 돌 축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강아지 적부터 집에서 길러온 메리가 분명하다. 술을 마셔서 더욱 그랬던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메리는 어머니가 얻어온 스피츠의 잡종 개였는데 아마 사람 나이로 치면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을 거였다. 사람 말귀를 다 알아 듣는다니까. 열 시가 넘어서자 집들의 창문에 하나 둘씩 불이 꺼져가기 시작했고 집 앞에 있는 외등만 밝혀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집으로 접근했다. 메리는 처음엔 몇번 짖었지만 나를 알아차렸는지 벌써부터 끙끙거리며 줄을 잡아당기고 요동을 쳤다. 나는 나직하게 꾸짖는 소리를 내면서 집을 돌아 나갔다. 아우의 방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다. 나는 손가락을 세워 가만히 유리창을 두드렸다.

누, 누구요?

놀랐는지 아우는 창문을 빼꼼히 열고는 목소리로만 물었다.

나야 나. 현관 문 좀 열어라.

마루로 나오는 소리가 들리고 현관 문이 열리면서 아우가 맨발로 뛰어 나왔다.

형, 어서 들어가요.

어머니 주무시냐?

조금 전까지두 텔레비 소리가 났는데 방금 누우셨나 봐.

마루는 어두웠다. 아우와 나는 그의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어머니 깨울까?

아니 조금 있다가 갈 때 뵙기루 하자.

형, 자구 갈라구 온 거 아뇨?

그럴 순 없다. 잠깐 들렀어.

아우는 그제사 정신이 들었는지 울컥,하고는 소매를 들어 눈을 가렸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식구들 마음 고생 시켜줘서….

우리야 뭐 잘 지내구 있어. 실은 나 이번에 미국 가기루 했어요.

거긴 가서 뭘 할라구 그래. 결국은 배가 좀 부른 종노릇일텐데.

여기선 더 이상 못살겠어요. 뭘하든 여기보다야 낫겠지.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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