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6·25참전용사 박정모-김호규씨

  • 입력 1999년 6월 25일 19시 14분


『서해 교전사태에서 보듯 북한은 늘 우리의 빈틈을 노립니다. 경계심을 늦춰선 안되죠.』

6·25전쟁 발발 당시 각각 소대장과 중대장이었던 박정모(朴正模·72) 김호규(金好圭·77)씨. 해마다 돌아오는 6·25이지만 이들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박씨는 해병대가 창설되자 간부1기생으로 지원, 해병1연대 2대대 6중대의 1소대장으로 전쟁을 맞았다.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서울로 진격한 그는 50년 9월26일 오전6시10분경 중앙청 옥상에 올라가 태극기를 올렸다. 카메라가 잡은 그 장면은 서울수복을 전세계에 알리는 상징적 사진이 됐다.

김씨는 6·25 당시 국군7사단 8연대 3대대의 9중대장. 전사(戰史)는 국군1사단이 50년 10월19일 평양을 완전 점령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7사단 8연대는 하루전에 대동강을 건너 평양시내로 들어간 상태였다. 모란대에 배치됐던 김씨의 9중대 병력은 평양을 공격하는 국군과 유엔군의 포격에 3,4명이 숨지기도 했다. 7사단이 해마다 10월18일 평양입성 기념행사를 여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들은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며 죽을 고비를 여러차례 넘겼다. 적이 쏜 총탄이 박씨의 철모와 갈비뼈를 맞힌건 7차례. 김씨는 중공군의 수류탄 2발에 왼쪽 다리가 거의 다 잘린 상태. 서울과 평양수복에 앞장선 이들은 고향(전남 신안군)이 같다는 걸 알고나서 서로 친근감을 느껴 연락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6·25전쟁 49돌을 맞아 25일 서울 용산전쟁기념관에서 다시 만난 이들은 “서해교전 당시 침착하고 용감하게 북한군을 물리친 후배 장병들이 자랑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송상근기자〉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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