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52)

  • 입력 1999년 6월 25일 23시 15분


나는 구태여 따지지 않고 어머니에게 그랬듯이 그가 대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방향을 바꾸었다. 대문 쪽으로 나가지 않고 동네의 뒷산 쪽으로 오르는 산길로 우회할 작정이었다. 생울타리 사이를 막 빠져 나가려 할 때였다. 메리가 미친 듯이 꼬리를 내저으며 거세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쭈그려앉아 놈의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고 긁어 주며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잘 있어라. 오래 오래 우리 집에 살아서 내가 다시 올 때 만나자, 응?

나는 집 식구에게라도 하듯이 중얼거렸고 아우는 뒷전에서 그러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메리가 기분이 풀리는 듯 아예 사지를 벌리고 드러눕자 나는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몸을 일으켜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미국 가서 잘 살고… 내 염려는 하지 마라.

아우는 묵묵히 손을 마주 잡았다. 나는 일부러 데면데면하게 손을 놓고는 울타리 사이로 빠져서 빠른 걸음으로 밭을 건너간다. 이번에는 동네 개들이 연쇄적으로 컹컹 짖어대는 소리. 다시 묘지가 있는 등성이를 넘어 동네의 뒷길을 돌아서 멀찍이 버스 종점 부근으로 다가선다. 골목의 어둠 속에서 기다리다가 버스가 떠나려고 할 때 재빨리 올라가서 운전수의 뒷자리에 앉았다. 집에 들러 보려는 생각에만 골똘했고, 조금 전까지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동네를 벗어나야 한다는 데만 사로잡혀 있던 탓인지 막상 버스에 오르자 딱히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촌의 명헌이에게로 다시 갈까 했다가 호선이의 부담스러운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금방 포기하고 만다. 어디로 갈 것인가. 버스의 행선지를 머리속으로 그려 보다가 신림동 부근이 떠오르고 야학 생활을 같이 하던 후배의 하숙집에 생각이 미쳤다. 오늘 하룻밤뿐이라면 어떻게든 비빌 수가 있겠지. 그리고 내일 해가 뜨면 그때 찬찬히 생각하자. 온몸에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나는 덜컹대는 버스의 빈 앞좌석 등받이에 팔굽을 올리고 머리를 기대고 잠깐 졸았다. 잠결에 한강 다리의 교각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여보쇼, 종점이오 종점.

하는 소리에 깨어나니 버스는 텅 비었고 청소하러 올라온 듯한 정비공이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이제 열두 시가 가까웠다. 술집이나 식당도 거의 문을 닫았고 비좁은 골목에는 취객 두엇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뿐이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고만고만한 집장사 집들이 늘어선 골목으로 올라가 어슷비슷한 집의 대문을 헤아려 나가기 시작했다. 곧 포도넝쿨을 대문 위에 늘어뜨린 낡은 철대문을 찾아내고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새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 집안은 불이 꺼진 지 오래인 듯 잠잠했다. 다시 한 번 새 우는 소리. 현관 쪽에 불이 켜지면서 졸음에 겨운 듯 나직한 여인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저어… 협이 있습니까?

아이 참… 기가 막혀서. 지금이 몇 신데? 협이 학생 시골 내려가구 없어요.

딸까닥, 하면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현관 불마저 꺼져 버렸다. 길게 하품을 하고 속으로 욕을 삼키면서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는 그네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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