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소련에 뒤지고 있던 미국이 이처럼 승리를 거두게 된 과정은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달착륙 직전까지 갔던 소련이 왜 뒤지게 됐는지는 소련의 잔해속에 지금까지 깊이 감춰져 있다.
우주계획을 둘러싼 소련의 비밀주의는 거의 병적이었다. 주요 로켓 설계자들의 신분은 문자 그대로 국가 기밀이었으며 소련 과학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완전히 격리된 환경에서 일했다. 이들의 과학적 업적이 학술지에 실린 적도 없고 업적을 이룩한 사람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 혹 실패하면 그 사실을 은폐했다.
소련이 달에 인간을 착륙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중에게 발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단호하게 부인되었다. 그리고 소련이 달탐사계획을 완전히 포기했을 때 크렘린은 달탐사계획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역사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지난 10년 사이에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이야기들이 조금씩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정부의 승인을 받은 달탐사계획에 관한 보고서가 1989년에 출판된 이후, 우주계획에 참가했던 몇몇 전문가들이 회고록을 통해 공식발표의 잘못된 점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첩보활동을 통해 소련의 우주계획에 관한 정보를 모았던 미국 CIA도 지금까지 비밀 서류로 분류되었던 위성사진과 첩보보고서들을 조금씩 공개하기 시작했다.
새로 드러나기 시작한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보면 소련이 달탐사를 둘러싼 미국과의 경쟁에 마지못해 뛰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소련의 과학자들은 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고 심지어 꼭 이길 가치가 있는 경쟁인지 의심스러워 하기도 했다.
흐루시초프 역시 비용이 많이 들 것이 뻔한 우주경쟁에 뛰어드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1961년 4월12일 소련이 사상 최초로 인간을 지구 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극을 받은 케네디 대통령은 5월 25일 미국이 달에 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달후 흐루시초프에게 공동으로 달 탐사를 추진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이를 거절했다. 소련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우주경쟁에 뛰어든 것도 역시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이때 소련은 달탐사계획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우주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한 사람,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룰료프는 케네디가 달탐사계획을 발표하기 훨씬 이전부터 달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태양계 행성들을 목표로 한 야심적인 계획의 받침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코룰료프는 케네디의 달탐사계획 발표가 유인우주여행에 대한 자신의 꿈을 정당화시켜 준다고 생각하고 주변의 과학자들을 설득했다. 과학자들은 곧 설득됐다. 그러나 정치가들과 군장성들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유인우주선을 달에 착륙시키는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소련의 과학자들은 군사계획을 위한 비용을 요구하는 군부와 돈을 놓고 경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소련이 우주계획에 투자한 돈은 미국이 아폴로계획에 투자한 250억 달러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않았다.
소련 과학자들에게는 시간도 별로 없었다. 대부분 군부와는 별도로 우주계획을 진행했던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우주경쟁에 투입한 과학자들과 장비들을 군비경쟁에도 그대로 투입했다. 소련 과학자들은 우주탐사 연구를 하면서 동시에 미국에 대항하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크루즈미사일등을 개발해야 했다.
게다가 소련의 산업계는 회사가 곧 마을이 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코룰료프는 자신의 설계실이 있는 포들립키라는 마을 전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코룰료프의 유도시스템 대부분을 설계했던 보리스 체르토크는 “코룰료프는 마을의 유치원과 학교, 병원, 종업원들의 건강문제에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고 말했다.
코룰료프는 우주계획이 계속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군부에서 파견한 코룰료프의 감시인이었던 케림 케리모프 장군은 “코룰료프는 언제나 군부의 뒷전에서 자신의 우주계획을 진행시켰다”면서 “군대가 첩보 위성을 쏘아올리기 위해 3t 용량의 로켓을 요구하자 코룰료프는 7t 용량의 로켓을 만들어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쏘아보냈다”고 말했다. N1이라고 명명된 대형 달탐사로켓을 만들 때도 코룰료프는 군부를 이용했다. 크렘린에 보낸 처음의 제안서에는 N1이 첩보위성 발사와 지구상에서의 다탄두 운반, 핵전투기지의 궤도발사 등을 위한 것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달과 행성의 조사’와 관련한 모호한 문구가 들어있기는 했지만 달에 인간을 착륙시키는 것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돼 있지 않았다.
유인 달탐사계획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일단 달에 갔던 우주선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미국도 소련도 로켓을 달에 보낼 능력은 이미 갖추고 있었다. 달에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는 승무원들이 달 궤도를 돌 때 머물게 될 우주선, 달표면에 착륙할 착륙선, 달에서 이륙하기 위한 연료, 지구대기권으로 진입할 때 승무원들을 보호해줄 보호막등 을 모두 가지고 가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무려 100t이나 되는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는 거대한 로켓이 필요했다. 게다가 달궤도로 진입하는 관문이 남반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북쪽에 위치한데다가 중국상공을 거치는 항로로 로켓을 발사하기를 꺼렸던 소련은 지리적으로도 대단히 불리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소련에서 가장 뛰어난 거대 로켓엔진 기술자인 발렌틴 글루시코와 코룰료프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글루시코는 인간에게 해가 없는 연료를 사용하는 강력한 엔진을 만들어 달라는 코룰료프의 부탁을 거절했다.
코룰료프는 하는 수 없이 거대엔진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는 비행기엔진 설계기술자에게 일을 맡겼다. 그는 기술적으로 매우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냈지만 크기가 너무 작아서 N1 로켓을 들어올리기 위해서는 30개나 되는 엔진을 고리모양으로 배치해야 했다.
많은 엔진이 서로 균형을 잃지 않고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섬세한 전자기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소련 과학자들은 미세전자공학 부문에 특히 약했다.
소련 항공부 소속의 설계국을 운영하고 있던 블라디미르 첼로메이는 엔진이 30개나 달린 코룰료프의 로켓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달에 착륙하는 대신 달궤도를 도는 계획을 작성해 승인을 받았고 코룰료프는 즉시 반격에 나섰다. 두 사람의 싸움은 결국 코룰료프의승리로끝났지만기술적으로 전혀 공통점이 없었던 두 사람의 계획은 엄청난 자원과 기술력을 소비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대해 크렘린은 미국인들이 오히려 소련인들처럼 행동하고 있다면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자유시장 신봉자들인 미국인들이 거대한 관료제를 동원해서 업계를 이끌어나가고 있었던 반면 겉으로 보기에는 한가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 소련에서는 탐욕스러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욱 더 치명타가 된 것은 코룰료프가 1966년에 종양제거 수술을 받다가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소련은 비밀로 분류되었던 그의 이름을 공개하고 그를 국가 영웅의 무덤에 안장한 후 거리와 마을, 심지어 달의 분화구에까지 그의 이름을 붙였다. 우주계획을 계속 이끌고 나가는 책임은 코룰료프의 부하였던 바실리 미신의 어깨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코룰료프와 같은 카리스마도 정치적 재능도 없었다.
코룰료프는 로켓을 발사하기전에 지상에서 부품 하나하나를 점검하고 시험하는 미국의 아폴로계획팀과 달리 일단 로켓을 쏘아 올린 뒤 실패를 하면 원인이 무엇인지 점검해서 더 나은 로켓을 다시 제작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아폴로계획팀의 방식은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코룰료프가 죽은 후에도 소련 우주계획팀의 작업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1969년 2월21일 코룰료프의 후계자들은 미국이 몇 달만 있으면 달을 향해 우주선을 발사하리라는 것을 알고 30개의 엔진이 달린 로켓의 무인 시험비행을 실시했다. 그러나 로켓은 발사된 지 68초후 추락했다.
월3일 소련인들은 다시 시험비행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로켓이 균형을 잃고 땅에 쓰러져 불꽃에 휩싸여 버렸다.
소련의 마지막 시도는 루나라는 이름의 무인탐사선을 달에 보내 표본을 채취해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탐사선은 착륙장치가 작동하지 않아 7월20일에 닐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내딛는 순간에도 여전히 달궤도에 못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달표면에 추락했다.
미국의 달착륙 장면을 흥분과 질시속에서 지켜본 소련과학자들은 69년 7월3일의 사고때 파괴된 발사대를 2년에 걸쳐 수리한 뒤 71년과 72년에 다시 로켓을 발사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소련 과학자들이 30개의 엔진을 완벽하게 조종하는 기술에 아주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시험 발사를 한번만 더 했더라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련정치가들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다. 방향을 잃고 표류하던 우주계획의 책임자로 1974년에 임명된 글루시코는 즉시 우주계획을 중단시키고 관련기록을 없애는 작업에 착수했다. 발사되지 못한 N1 로켓들은 해체돼 고철로 쓰였다.
코룰료프와 함께 달탐사계획에 참가했던 기술자 겸 우주비행사인 콘스탄틴 페옥티스노프(73)는 지금 생각해보면 유인 우주비행을 둘러싼 미소간의 오랜 경쟁은 미친 짓이었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달탐사계획을 세운 것은 미국이 달탐사계획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과학자들이 아니라 정치가들이었다.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폴로계획은 대단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인가. 달에서 바위 조각들을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250억 달러를 다른 곳에 썼더라면 훨씬 더 흥미있는 일을 해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