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기 최고의 호황을 맞은 미국에서 80년 30만건에 불과했던 소비자파산 사건이 97년에는 오히려 140만건으로 늘어나는 등 300% 이상의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미국에서 개인파산이 급증하기 시작한 것은 신용카드가 주요 결제수단이 되면서부터다. 개인파산의 원인은 장기 실업, 주식투자 실패 등도 있지만 카드 과소비가 주류를 이룬다. 능력없는 사람이 무절제하게 카드를 긁고 다니다 엄청난 빚을 안고 파산에 몰리는 것이다. 미국 하원이 파산법을 개정한 것은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를 막기 위한 것이다.
일본에서도 80년대 이후 소비자파산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샐러리맨들이 월급을 담보로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쓰고 이를 갚지 못해 파산신청을 내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특히 거품경제가 붕괴된 90년대 이후 신용카드로 인한 파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한국에서 소비자파산이 사회문제화되기 시작한 것은 96년말 이후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맞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올 5월말까지 서울지법에 접수된 소비자파산 신청건수는 이미 지난해 1년 전체보다 많은 170여건에 달했다.
서울지법 민사합의 50부는 97년 5월30일 12개 금융기관과 사채업자에게 진 빚 2억5000여만원을 감당하지 못하던 대학교수 부인 H씨에게 첫 소비자파산 선고결정을 내렸다.
H씨는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93년 사업을 하는 오빠에게 보증을 섰다가 오빠가 부도를 내고 피신하자 13년6개월간 근무하던 병원에서 퇴직하고 퇴직금 전액을 빚을 갚는데 사용했다. 대학교수인 남편도 손위 처남을 위해 선 보증 때문에 월급의 반을 압류당했다. 이들 부부는 모든 재산을 압류당해 시아버지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절망속에 살아오다 파산신청을 냈다.
재판부는 “H씨에 대한 채무상태 및 재산상황을 조사해본 결과 재산이 전혀 없고 채무를 변제할 능력도 없는 만큼 파산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H씨는 그로부터 6개월 뒤 법원의 면책결정을 받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한국에는 H씨처럼 친인척의 보증을 섰다가 파산한 사람들이 많다. 98년 한해 동안 서울지법에 접수된 162건의 파산신청자 중 24명(15.5%)이 친인척의 빚보증을 서준 사례다. 그 다음은 사업실패(59명 38.1%).
나라마다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신용카드의 증가는 소비자파산의 증가로 이어진다. 결국 신용카드를 마구 발급하는 것이 대량 소비자파산을 불러 역설적으로 신용사회의 위기를 조성한다. 한국은 96년말 총인구당 카드 보급률이 0.8장으로 미국 2.1장, 일본 1.8장, 영국 0.9장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1인당 국민총생산(GNP) 비율로 볼 때 당시 한국의 카드 이용금액은 일본의 2배이상 높은 수준. 올 3월말 기준 한국의 카드보급률은 4229만9000개로 늘어나 ‘1인당 1장 시대’가 열렸다.
법원 관계자들은 신용카드로 인한 파산이 앞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신용카드 연체대금 소송이 전국 법원에서 취급하는 민사사건의 절반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입보다 과도한 물건구매→신용카드 대금지급→새카드 발급해 메우기 반복→카드 10여개로 고율의 현금서비스 이용→최후의 수단으로 고리대금업자에게 ‘카드깡’ 대출→파산. 신용카드로 파탄에 이르게 되는 판에 박은 과정이다.
97년 9월 발생한 박초롱초롱빛나리양(당시 8세·초등학교 2년) 유괴살해 범행도 신용카드 빚이 발단이었다. 무용교사인 범인 J씨(여·당시 28세)는 검거직후 “신용카드 연체대금이 1000여만원을 넘어 집이 압류당하는 등 빚에 시달려…”라고 범행동기를 털어 놓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내무부 산하 고위공직자로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더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3개월 이상 대출금을 연체한 금융불량 거래자는 148만9000명에 이른다. 올 5월말 기준 롯데백화점의 불량거래자는 2만1000명(연체금액 150억원), 신세계 1만3310명(〃 90억원). 한국신용평가가 98년 4월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신용불량자’로 낙인 찍힌 사람은 215만명을 넘는다.
카드업체들은 별다른 신용조사도 하지 않은 채 경쟁적으로 카드를 발급하고 있다. 특히 이들 업체는 수입이 없는 무자력자에게도 마구 카드를 발급해 이로 인한 폐단이 적지 않다. 무자력자가 부도를 내면 부모나 가족이 대신 카드빚을 갚아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김인만(金仁滿)변호사는 “카드회사의 카드남발과 소비자들의 무절제한 카드사용으로 인한 대량 소비자파산은 신용사회의 덫”이라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서울지법은 98년 12월8일 소비자파산 선고결정을 내린 9명에게 전부 면책결정을, 2명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일부 면책결정을 내렸다. 일부 면책결정은 현행 파산법에는 규정이 없지만 미국 일본에서 판례로 널리 인정되고 있는 제도. 이들 2명은 면제받은 채무(각각 60,70%)를 제외한 나머지 빚을 갚아야 복권이 인정된다.
소비자파산과 면책결정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현대판 빚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새출발의 길을 열어주는 제도이지만 자칫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수도 있다.
법원은 올들어 소비자파산 신청이 급증함에 따라 엄격한 심사를 통해 면책결정을 내리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최영훈기자〉cyhoon@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