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삶·예술]13대의 TV로 시작된 「백남준 신화」

  • 입력 1999년 7월 1일 19시 25분


《모든 예술의 탄생배경에는 나름대로의 신화가 있다.

그리고 그 신화는 대부분 실제보다 부풀려져 있으며

대중은 예술보다는 예술가를 중심으로 한 신화를 즐긴다.

비디오예술도 예외가 아니다.

단지 비디오신화의 배경에는 예술가 대신 부분적으로 증권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이단적이다.》

백남준이 비디오예술의 시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증권투자에서 시작되었다. 백남준은 독일 유학시절 꼬박꼬박 부친이 보내주던 학비로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5·16군사혁명이 나면서 재산이 몰수되는 등 집안이 어렵게 되자 부친은 학비를 더 이상 부쳐줄 수 없다는 연락과 함께 마지막 송금을 하게 되었다.

백남준은 61년부터 이미 텔레비전 연구에 몰두하면서 당시 대중의 우상으로 등장한 텔레비전을 이용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에서 부쳐준 돈으로는 자신이 기획한 전시회를 충분하게 구성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일도 걱정이었다.

백남준은 여러 궁리 끝에 송금된 돈을 조금이라도 불려볼 욕심으로 증권사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당시로서는 꽤 되던 마지막 송금액을 3가지 주식에 나누어 투자하였다. 나름대로 자문은 했지만 초심자의 선택이라는 것이 뻔해서 두 종목은 완전히 망하고 오스트리아계 은행주식만이 그나마 꽤 이익을 남겨주었다.백남준은 오스트리아 은행주식을 판 돈으로 텔레비전 13대를 살 수 있었다. 13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예산으로 살 수 있었던 텔레비전의 수였다.

백남준이 일본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한지 7년째 되던 63년 3월, 독일의 소도시 부퍼탈에서는 텔레비전 13대가 동양의 젊은 예술가에 의하여 호되게 괄시당하고 억압당하는 매우 공격적인 전시회가 열렸다. 백남준은 이 전시회에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이라는 다소 애매한 제목을 붙였다. 음악을 전시하겠다는 발상에다 그 전시가 전자텔레비전과 관계가 있다는 암시가 깔려있다. 이 전시는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나머지 다소 어설픈 착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비디오예술의 첫 전시회로서 백남준 신화의 첫 페이지에 기록되었다.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 전시는 역사에 남는 사건이 되었다. 이 전시회는 당시까지 음악가나 행위예술가로 알려져 있던 백남준이 텔레비전이라는 예술 영역을 새로 개척한 이벤트인 동시에 비디오역사의 장을 연 문제의 전시이다.

엥겔스가 살았던 독일의 소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그의 첫 전시회는 결국 오스트리아 은행의 주식을 판 돈으로 마련되었으니 비디오예술은 증권에서 태어난 셈이다. 그의 첫 전시는 주식시장처럼 화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난장판이었다.

그는 13대 가운데 12대의 텔레비전을 전시하면서 텔레비전의 기능을 온전히 살려둔 것은 거의 없었다. 어떤 것은 영사막을 거꾸로 뒤집어놓거나 관객이 발로 밟아야 기능을 하도록 조작해놓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영사막을 조작하여 하나의 가느다란 선으로 묘사하였고 이것을 ‘TV 참선’으로 제목을 붙였다. 배치방법도 의도적으로 무질서하게(우연적으로) 유도하였으며 관객이 접근하여 매만지거나 건드려야 작동되도록, 즉 TV문화를 관객의 지배하에 둔 것이 특징이었다.

이 전시회의 기본적인 개념은 60년대 대중문화의 성상이며 우상이던 텔레비전을 공격하고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은 대중의 의식을 교묘하게 디자인하며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보다는 방송국의 이익에 맞는 편집을 통하여 각색한다. 전시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텔레비전을 억압하고 해체시키기위해 우선 당시 가정에서 보던 TV의 이미지와 어떻게 다르게 연출할 것인가를 고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텔레비전과 다른 연출, 즉 귀중한 가구로서의 역할이나 당시 재산가치로서의 텔레비전의 의미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텔레비전은 백남준에 의하여 호되게 억압당하거나 기능이 제어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아마도 텔레비전이 태어난 후 처음으로 겪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이 전시회에는 텔레비전만 선보인 것이 아니라 파르나스화랑 전체를 활용하여 다양한 오브제도 함께 전시되었다. 2층 욕조에는 마네킹이 설치되었으며 전시장 바닥에는 4대의 조정된 피아노가 아무렇게나 배치되었다. 그리고 쳐다보면 일그러져 보이는 거울을 비롯하여 무작위 접근방식의 레코드 테이프도 전시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음악과 텔레비전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백남준은 존케이지가 갖고 있던 ‘음의 시각화’ 등 청각예술과 시각예술의 결합을 위한 시도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라디오+그림’으로 해석해 볼 때 음과 이미지의 결합은 예술에서의 혁명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백남준의 기대와는 달리 관객이나 언론으로부터 크게 환영받지는 못하였다. 독일의 비평가들은 리뷰에서 이 전시회를 ‘네오다다 유치원’으로 평하거나 ‘소란’ 또는 ‘시장바닥’ 등으로 묘사하여 백남준을 실망시켰다. 이러한 평에 대하여 백남준은 “사람들이 서로 상이한 TV의 변형들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10년은 필요하다”며 애써 무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 말은 단순히 불평이 아니었다. 오늘날 이 전시회가 비디오예술의 기원으로 기록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백남준의 언급이 뼈있는 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 전시가 어떻게 비디오예술의 기원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63년까지만 해도 비디오 카메라는 시판되지 않았다. 그러나 비디오예술은 본질적으로 텔레비전 모니터를 필요로 한다. 비디오 카메라가 시중에 나온 65년 이후 모든 비디오예술이 백남준의 첫 전시를 모델로 설정함으로 해서 그는 이른바 시조가 된 것이다. 비디오예술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디오카메라를 사용해야 한다는 시각은 지나친 매체중심적 사고이다.

이용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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