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모든 사람이 다 자기를 좋아하도록 할 수는 없다. 가능한 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두루 선택해주기를 바라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신문은 상당한 한계를 지닌다. 생동하는 영상과 대비되는 정태적인 문자의 한계를 구조적으로 지니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문은 스스로 신문다운 독특한 사명을 가진다. 사실을 이미지로 전하기 보다 이를 개념과 논리로 되빚어 전하는 것으로 자기를 특성화하는 것이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때 비로소 신문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장을 담은 사설, 전문가의 해설, 여러 사람들의 의견, 시의적절한 기획기사 등을 독자들이 탐하는 것은 사실의 직접적인 전달보다 그것이 더 근원적인 자리에서 삶의 더 넓은 지평을 준거로 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을 신문을 통해 짐작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신문의 역할과 독자의 기대는 이러하다.
지난 한 주에도 무척 많은 일들이 있었다. 민영미씨 귀환, 국정원 정치단 신설, 남북차관회의, 화성 씨랜드 화재, 공무원 경조사비 문제, 삼성차 처리 등. 요즘에는 누구나 다양한 언론매체에 노출돼 있어 각 매체를 아무나 비교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동아일보는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큼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있다. 국정원 정치단 문제가 특히 그랬다.
기대만큼 아쉬움도 많았다. 왜 언론이 민영미씨와 자유로운 면담을 하지 못했는지, 또는 안했는지 못내 궁금하다. 화성 화재에 대한 사설이 왜 없었는지도 궁금하다. 늘 있는 화재라고 하기에는 너무 충격이 컸던 일이었다.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은 종교사 안에서 개벽의 전조로 상징화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여운이 가라앉지 않아 더욱 그러했다. 다행히 2일자 A6면 특별기고란의 강정규씨 글이 아쉬움을 훨씬 덜어주었다.
북관대첩비 귀환 소식도 귀한 것이었다. 이를 기화로 문화재 반환문제나 북한과의 문화재 교류문제를 폭넓게 다루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건축문화의 해 기획기사로 연재중인 서현의 ‘우리 거리 읽기’는 늘 감동을 안겨준다. 때로 건축을 압도하는 이념의 과잉이 조마조마하지만 아직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문화감각을 위한 눈뜨기를 위해 지불해야 할 투자라고 믿는다.
아침 신문에서 가끔 시를 한 편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갑작스러운 ‘여유’다. 그러나 선자(選者)의 해설이 아무리 짧아도 꼭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친절이 아니라 여유의 박탈일 수도 있다.
6월 28일 ‘미즈 & 미스터’ 난에 호텔 여름 패키지 상품 안내가 있었다. 광고인지 기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좀더 서민적인 여름 보내기 기사를 마련할 수는 없었을까?
교육계 문제가 뜻밖에 소홀하다. 두 개의 교원노조의 출범, BK21문제 등은 아무래도 태풍의 눈이다. 일어난 사건만을 다루는 일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건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일도 신문의 몫이다.
정진홍(서울대교수·종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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