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60)

  • 입력 1999년 7월 5일 18시 21분


언니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거야? 그런데 그가 활동가로 감옥에 갔단 말이지. 하긴 우리 주변에도 그런 젊은이들이 많아. 작년에 나두 어떤 봉사활동 동아리에 들었어. 졸업반 선배가 하나 있었는데 나두 은근히 그를 좋아했어. 그런데 그는 우리를 데리고 한 달에 한번씩 빈민가에 진료 봉사를 하러 다녔는데 이번 학기부터 보이질 않아.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누구 얘기로는 학교 때려치우고 공장에 들어갔대. 무슨 열병같이 그러다 가슴 따뜻한 의사가 되어서 훨씬 어른스런 모습으로 돌아오겠지 뭐. 내가 남의 말처럼 하구 있어서 미안해.

아이 참, 그런데 언니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 묘했어. 마치 아기를 낳은 엄마인 것처럼 확실한 체험인 듯이 말하구 있잖아. 어머니가 된 여자는 그 전의 여자가 아니라구? 나는 언니 편지를 몇번이나 되새기면서 다시 읽어봤어. 언니야, 불쌍하게도 어느 두메 산골에서 정말로 아가를 혼자 낳았다는 거야? 아니 무슨 청승이람. 정말 언니, 나한테 이렇게 할 거야? 나는 엄마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혼자서 속을 끓이구 있어. 언니는 옛날부터 나를 어린애 취급만 했지. 다른 학부 같으면 난 벌써 사학년 졸업반이구 약혼이네 결혼이네 서둘러서 해치운 친구들도 많이 있어. 언니, 이 편지를 받자마자 내게 답장해. 봉투에는 현주소를 똑똑히 적어서.

나는 곧 주소를 알려 주겠다고 간단히 답장을 해주고도 시월이 다 될 때까지 차일피일 미루다가 정희에게 오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는 투로 다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정희 말대로 갈뫼의 교감 선생님네 주소를 겉봉에 똑똑히 적어서 보냈어요.

동생은 편지를 받자마자 내려왔나 봐요. 일주일도 못돼서 그 애가 나타났어요. 은결이 우유를 먹이고 나서 재워 두고 봉당에 내려가 모처럼 화판 앞에 앉았는데 밖에서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어요.

한 선생, 은결아아….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부엌 유리창으로 내다보려는데 벌써 정희와 사모님은 툇마루에 무릎을 딛고 방문을 열고는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예요. 나는 잠시 모른척 하고 팔짱을 끼고 서서 그들을 내버려 두었죠. 정희가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더군요. 나는 살그머니 부엌에서 방으로 올라가는 쪽문을 열고 찬마루에 걸터앉아서 정희가 하는 양을 살폈습니다. 정희는 잠든 은결이의 자리 위로 상반신을 굽히고는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찬찬히 내려다보았어요. 교감 선생님 사모님도 방안으로 들어와 정희가 보는 각도와 같은 시선으로 보겠다는 듯이 그네 바로 등 뒤에서 함께 몸을 굽혔어요.

보소, 을매나 참헌가. 이목구비가 또렷하제?

그때 나는 참지 못하고 문을 조금 더 열면서 작은 소리로 동생을 불렀습니다.

정희야….

동생은 평소의 성격대로 서두르지 않고 고개를 천천히 돌리더니 잠깐, 물끄러미 바라보았어요. 그리고는 눈 속이 글썽해지면서 중얼거리더군요.

언니…애가 너무 이뻐!

은결이 때문에 우리는 긴 말 할 것 없이 저절로 인사를 다 나눈 셈이 되어 나도 정희 옆에 나란히 앉아 아가를 내려다보았죠.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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